[10/6 오늘] 승자 없는 욤키푸르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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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오늘] 승자 없는 욤키푸르 전쟁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10.05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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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오일쇼크로 이어져…대량의 미·소 첨단 무기 동원된 전쟁

 

1973년 10월 6일은 유태인들에게는 욤키푸르(Yom Kippur)라는 최대 명절이었고, 아랍인들에겐 라마단(Ramadan) 기간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속죄의 날’인 이날 금식을 하며 하느님께 죄를 회개하며 용서와 화해를 실천한다. 직장인들은 대개 휴무하고 전선의 군부대에서도 최소한의 병력만 남겨 놓은채 대대수 군인들이 귀가해 명절을 보내고 있었다. 시민들은 TV나 라디오 시청도 하지 않고 전화도 꺼놓고 지냈다. 이스라엘 첩보기관 모사드도 적의 수상한 이동을 감지했지만, 단순한 훈련으로 치부하고 말았다.

이런 허점을 안와르 사다트(Anwar Sadat} 이집트 대통령은 복수의 기회로 삼았다. 이집트는 시리아와 연합군을 형성했다. 6년전, 1967년 6일 전쟁에서 빼앗긴 시나이반도와 수에즈 운하, 골란고원을 도로 찾고, 나아가 이스라엘을 지중해로 쓸어 넣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세웠다.

10월 6일 오후 2시 이집트군은 스에즈 운하를 건너 시나이반도로 진격하고, 동시에 시리아군은 수많은 탱크를 앞세워 골란고원을 넘어왔다.

처음에는 이집트와 시리아가 우세했다. 이집트군는 75만 병력에 소련제 탱크 3,200대, 미사일(SA-6)까지 총동원했다. 이스라엘 병력은 이집트의 3분의 1도 되지 않았고, 개전 초기에 욤키푸르 명절 때문에 병사들에게 동원명령이 전달되지 못했다. 개전 48시간 만에 이스라엘은 17개 여단이 전멸되었다. 시리아도 소련제 무기를 앞세우며 이스라엘 북부 골란고원으로 밀고 들어왔다. 이집트군은 수에즈 운하를 돌파하고 시나이반도의 이스라엘 방어선을 돌파했다.

 

▲ 1973년 10월 7일 수에즈운하를 도하하는 이집트 탱크 /위키피디아

 

전쟁 3일째 되는 날, 이스라엘군은 기습공격에 대한 패배를 극복하고 전선을 교착상태로 만들었다. 더 이상 이집트와 시리아군이 밀고 들어오지 못했다.

이를 기화로 이스라엘군은 우선 전력이 약한 시리아 공격에 집중했다. 이집트는 나중에 상대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이스라엘군은 시리아군에 맹공을 퍼부어 전쟁개시 5일째인 11일에 골란고원에서 반격에 성공했다. 시리아군은 골란 고원에 800여 대 이상의 전차를 버리고 철수했다. 이스라엘군은 골란고원에서 전력을 빼돌려 시나이 전선에 투입해 16일 새벽에 운하를 도하하고, 이집트의 수에즈 시까지 진격해 초전의 패배를 만회했다.

 

▲ 수에즈 전투 /위키피디아

 

전쟁은 확전 조짐을 보였다. 미국이 이스라엘에 무기를 제공하고, 소련이 아랍을 지원하고 나섰다. 이스라엘은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 외곽을 포격하기 시작했고, 수에즈 운하 도시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을 시도했다.

결국 유엔이 중재에 나서 10월 22일 유엔 중재안이 발표되었다. 양측은 유엔 중재안으로 놓고 다툼을 벌여 다시 전투를 벌였지만, 10월 25일 2차 휴전안이 발표되어 전쟁은 발발 19일만에 종결되었다.

 

▲ 골란고원 전투 /위키피디아

 

▲ 당시 정세도 /위키피디아

이 전쟁은 이스라엘측에선 욤키푸르 전쟁, 아랍측에선 라마단 전쟁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직후 아랍국과 벌인 제1차 중동전쟁, 1952년 이집트의 수에즈운하 국유화 선언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개입한 수에즈 위기, 1967년 이집트-이스라엘간 6일 전쟁에 이어 제4차 중동전쟁이라고도 한다.

이 전쟁은 미국과 소련의 최신식 무기가 총동원되었기 때문에 엄청난 인명피해를 냈다. 이스라엘측에선 사망자 2,500~2,800명, 부상자 7,200~8,800명, 포로 293명의 인명피해가 났다. 이집트와 시리아는 인명피해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지만, 이집트 5,000명, 시리아 3,000명등 모두 8,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부상자만도 아랍측에서 1만8,000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파괴된 무기도 엄청났다. 이스라엘은 탱크 400대가 파괴되고, 600대가 고장났으며, 102대의 전투기를 잃었다. 아랍 탱크는 2,250대를 잃었으며, 이중 400대가 이스라엘에 빼앗겼다. 아랍국의 전투기는 334대나 잃었다. 어쨌든 당시 시나이반도와 골란고원에서 부서진 무기들로 인해 세계 고철시장의 관심이 모아지기도 했다.

 

▲ 수에즈 전투서 파괴된 이스라엘 탱크 /위키피디아

 

이 전쟁은 서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채, 어느쪽도 이기지 못한 전쟁이었다. 하지만 이집트는 승리의 자신감에 차있었다. 더 이상 이스라엘과 그 배후의 미국에 밀리지 않고 아랍의 주도권을 쥐었다고 판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랍국가들은 이스라엘이 만만히 공격할수 없는 상대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욤키푸르 전쟁(또는 제4차 중동전쟁)은 오일쇼크를 유발했다. 이 전쟁으로 중동 산유국들이 이스라엘을 지지한 서방에 경제적 피해를 주기 위해 석유수출을 금지하는 바람에 국제유가가 급등했다.

그해 10월 16일 페르시아만의 6개 석유수출국들은 OPEC 회의에서 원유가격을 17% 인상한다고 발표한 데 이어 17일 이스라엘이 아랍 점령지역에서부터 철수하고 팔레스타인의 권리가 회복될 때까지 매월 원유생산을 전월에 비해 5%씩 감산하기로 결정했다. 중동전쟁에서 석유를 정치적인 무기로 사용한 것이다.

이에 따라 1973년 초 배럴당 2달러 59센트였던 중동산 원유 값은 1년 만에 11달러 65센트로 무려 4배 가까이 올랐다. 제1차 석유파동이다. 싼값으로 원유를 들여오던 서방 국가들이 경제적 공황 상태에 직면했고, 1975년에는 서방 선진국들이 마이너스 성장을 하게 되었다. OPEC의 원유감산조치로 전세계에 자원민족주의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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