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10월초였다. 오스트리아에 체류 중이던 필자는 TV를 켜고 CNN을 보았더니, 보리스 옐친(Boris Yeltsin) 러시아 대통령이 의회에 포격을 가하고 있는 장면이 나왔다.

급히 러시아 비자를 발급받아 모스크바 공항에 들어 갔다. 러시아 의회 옆에 호텔을 잡았는데, 호텔 방 창문에는 총탄 자국이 군데군데 나 있었다. 치열한 총격전이 이 호텔 주변에서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다음날, 의회 건물을 찾았더니 흰색 건물에 시커멓게 불탄 흔적이 흉물스럽게 드러났고, 모스크바 시민들이 몰려들어 역사의 현장을 구경했다.

 

1993년 10월 3일 저녁, 보리스 옐친 대통령은 행정명령 1400호를 발령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모스크바 외곽에 주둔한 전차사단을 끌어들여 모스크바 시내에 배치시켰다.

다음날인 10월 4일 옐친을 지지하는 군대는 탱크 부대를 동원해 소비에트(Soviet)로 불리는 의회 건물 상층부에 포탄을 퍼부었다. 146명의 사상자가 났다.

15개 공화국으로 구성되었던 소비에트연방(소련)은 2년전인 1991년 해체되었지만, 의회는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옐친의 자유주의 개혁을 방해했다.

1993년 9월 옐친은 의회 해산을 해산하고 12월 총선을 치르겠다고 선언하자 공산주의자들이 화이트 하우스(White House)라 불리는 의회 건물을 중심으로 극렬히 저항했다. 옐친은 군대를 동원해 강제로 의회를 해산했다. 그해 12월에 구성된 신 의회 두마(Duma)는 옐친의 개혁안을 받아들였다.

이로써 1917년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공산주의 국가를 세운 러시아는 공산주의를 뿌리채 탈색했다.

이 사태를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1993 Russian constitutional crisis)라 부른다.

 

 

1917년 11월 7일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지 86년만에 러시아 공산당이 뿌리째 뽑혔다. 80여년간의 러시아 공산주의 실험은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러시아 혁명은 인류 최초로 마르크스주의를 실현한 혁명이었다. 1922년 주변 14개 공화국을 연결하는 소비에트연방을 형성해 공산세력은 러시아 주변 국가로 확산했다. 2차 대전 이후 동유럽, 중국, 북한, 베트남, 쿠바에 공산국가가 수립돼 세계를 반분하는 큰 진영을 형성했다. 한반도 분단도 러시아 혁명 이후 이어져온 세계사 흐름에서 전개된 것이다.

 

지난 100년간 인류를 실험장으로 몰아넣은 공산주의는 실패로 귀결되었다. 그러면 소비에트의 공산혁명은 왜 실패했는가.

첫째, 평등주의 실현을 위한 계획경제가 실패했다는 점을 꼽을수 있다.

공산주의는 경제적 평등이라는 이상적 가치가 국가의 통제에 의해 실현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러시아와 소련을 구성하는 공화국들은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려고 70년동안 실험했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 소련은 강력한 중앙통제 경제를 실시하며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전후 소련은 GNP 규모에서 미국 다음가는 산업국가로 발전했다. 1950년대말 일부 서방 학자들은 소련이 미국을 따라잡을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가 1985년 권력을 잡기 20년전부터 소련의 경제성장이 둔화하고 있었다. 성장의 주축이었던 값싼 원료, 풍부한 노동력, 계획에 의한 집중 투자기회가 1970년대 중반에 바닥을 드러냈고, 미국과 유럽의 산업 생산력에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뒤쳐졌다.

1970년대 말, 소련경제의 위기는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피부로 느낄 정도가 됐다. 그러나 타성에 젖은 관료들은 이 위기를 실감하지 못했다. 폐쇄적인 관료들은 위기를 은폐하고 오히려 심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지하경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국가재산이 빼돌려져 암거래됐고, 서방에서 밀수입된 상품들이 지하에서 고가로 거래되기 시작했다.

 

둘째, 새로운 특권계급이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공산당내 '노멘클라투라‘(nomenklatura)라는 특권계급이 형성됐다. 적대계급이 사라졌다는 공산 사회에 새로운 계급이 형성된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지위와 특권을 유지하는 데 급급하며 부패한 관료주의를 만연시켰다. 공업화가 진전되면서 형성된 전문직 종사자를 비롯한 중간층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서방국가와 비교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 들어 경제성장률은 사실상 제로 상태로 떨어졌고, 생산성도 격감했다. 행정·명령형 경제체제와 관료주의로 인한 물자의 낭비와 비효율성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국민들은 경제위기를 피부로 느끼면서 불만을 표출했다.

 

셋째, 개혁 시도가 너무 늦었다.

소련 경제에 구조적 문제가 드러나는 와중에 1983년 여름, 노보시비르스크 지역의 자슬라프스카야 등 연구자들이 중앙집권 계획경제의 문제점을 지적한 「노보시비르스크 경제보고서」 작성했다. 이 보고서는 중앙집권 계획경제의 문제점을 ① 경제 의사결정의 과도한 중앙집권 ② 생산계획 책정의 일방적·명령적인 성격 ③ 미약한 시장 발전 ④ 노동에 대한 중앙 규제 등 8가지 문제점을 지적했다. 요약하자면, 기업활동이 중앙관료기구에 의해 질식할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 「노보시비르스크 보고서」는 개혁논쟁의 출발신호 역할을 하며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체제위기의 절정에서 1985년 3월, 54살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당 서기장이 됐다. 개혁파의 리더였던 고르바초프는 고질적인 경제정체를 깨기 위해 페레스트로이카(개혁)과 글라스노스트(개방)를 주창했다.

경제개혁에서 고르바초프는 두 방향을 제시했다. 첫째는 기업 경영을 포함한 경제제도의 민주화였고, 둘째는 경제에 시장요소를 더 많이 도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개혁과 개방은 새로운 위기를 초래했다. 자유화의 바람을 타고 탄전지대의 광부를 비롯한 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이 일어났고, 그루지야와 발트 연안 3개 공화국에서 탈연방 독립운동이 거세졌다. 대중들에게 페레스트로이카의 효과가 느껴지기 이전에 지배체제 이완을 틈타 소수민족들의 독립욕구와 노동자들의 요구가 분출된 것이다.

 

넷째 민족 문제 해결에 실패했다.

소련 공산당은 민족문제를 지나치게 이념에 입각해 밀어붙였다. 볼셰비키는 민족주를 자신들의 대의를 위해 이용했다. 그들은 노동자들의 계급적 연대가 민족주의보다 중요하다는 마르크스주의 이론 규정을 그대로 따랐다. 비러시아계 민족들이 차르(러시아황제) 체제에 저항하는 운동을 벌이자, 볼셰비키들은 민족주의를 이용하면서 공산 이념의 틀에 옭아 넣었다.

하지만 자유화 바람은 소련에 강제병합된 14개 공화국의 독립운동에 불을 붙였다.

발트 3국이 1990년 3월 리투아니아의 독립선언을 계기로 탈소 독립운동을 가속화했다. 이어 이제까지 소련 내에서 실체가 없었던 러시아 공화국은 보리스 옐친이 공화국 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한 후 주권선언을 했다. 모스크바에 소련과 러시아의 이중권력 상태가 출현한 것이다.

 

 

1991년 8월 18일 소련공산당 보수파들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고르바초프의 권한을 박탈하고, 크림 지역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던 그를 체포했다. 하지만 쿠데타 발생 몇 시간 뒤 옐친은 시민들에게 불법 쿠데타 반대를 촉구한 뒤 러시아 공화국의 통제권을 장악했음을 선언했다.

곧이어 발트 3국등 여러 연방국들이 독립을 선언하면서 러시아·벨라루스·우크라이나등 슬라브계 세 공화국의 지도자들이 민스크에 모여 소비에트 연방의 소멸을 선언했다. 고르바초프는 이 조치가 위헌이라 반발했지만, 결국 소련 대통령직을 사임함으로써 15개 공화국은 모두 독립했다. 그해 12월 24일 소련은 지구상에서 그 자취를 감추게 됐다.

1917년 10월 혁명으로 탄생한 러시아 공산주의는 1991년 소련의 해체로 종식된다. 74년만에 인류의 대실험은 실패를 선언한 것이다. 2년후 의회에 남아있던 공산주의자들마저 옐친이 무력으로 진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