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0 오늘] 통화 분쟁에서 촉발된 베를린 봉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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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0 오늘] 통화 분쟁에서 촉발된 베를린 봉쇄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9.29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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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분단의 서막…베를린 접수하려던 스탈린의 시도 무산

 

1949년 9월 30일, 15개월에 걸친 소련의 베를린 봉쇄가 공식적으로 해제되었다.

베를린 봉쇄는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동서냉전이 격화하면서 벌어진 최초의 실력대결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소련은 서베를린을 봉쇄해 독일 수도를 차지하려 했지만, 미국과 서방국의 공수작전으로 실패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한 이후 독일 땅은 미국·영국·프랑스·소련 등 4개 연합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고, 수도 베를린도 공동관리구역으로 4개국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 졌다. 베를린은 소련군 점령지구에 위치해 섬처럼 고립되었다.

소련의 스탈린은 독독내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를 부추겨 서방국가 점령지역에서 반 파시즘 공동전선을 구축해 독일을 공산화할 것을 지시했다. 스탈린의 전략은 독일을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동베를린 주민들은 소련을 싫어했다. 1946년 지방선거에서 베를린시, 특히 소련 점령하의 동베를린에서 비공산주의자들이 시 공직자에 당선되었다.

소련의 이같은 움직임에 대응해 미국과 영국이 우선 점령지구의 통일을 논의했고, 나중에 프랑스가 가세했다. 소련도 서방국가의 대응에 제동을 걸기 시작해 1948년 1월부터 미국과 영국 점령지구에서 베를린으로 가는 열차에 검문검색을 강화했다.

4개국에 의해 점령된 독일은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지 못하고 서서히 분단의 길로 가고 있었다. 미국 주도로 서방 3개국 점령지구를 독일연방국으로 통합하는 논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소련은 서베를린을 조여갔다.

1948년 3월 25일 소련은 서방 군사요원과 승객이 베를린 지역을 가는 것을 저지시켰고, 4월 9일엔 미군 통신요원을 동독지역에서 철수하라고 통보했다.

 

▲ 2차 대전 패전후 독일 영토 분할 /위키피디아

 

여기서 통화전쟁이 발생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4국의 점령지구에선 전쟁 이전의 제국마르크(Reichsmark)를 단일 통화를 쓰고 있었다. 전후 제국마르크는 소련 점령지구에서 찍어냈는데, 소련은 엄청나게 돈을 찍어냈다. 1920년대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연상시킬 정도로 물가가 폭등했다. 제국마르크는 휴지조각이 되고, 담배가 사실상 통화 기능을 하면서 ‘담배 통화’라는 말이 생겨났고, 독일 경제는 물물교환 경제로 추락했다.

서방 3개국은 독일의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1948년 6월 18일 제국마르크를 대체해 새로운 독일마르크를 도입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소련은 자기들이 찍어낸 화폐만이 정통이며, 새 화폐는 불법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소련은 새 통화를 찍어내면 베를린을 봉쇄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방 진영은 6월 21일 새 통화를 찍어 유통시켰다.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소련은 6월 23일 동독 내에 위치한 서베를린을 연결하는 일체의 철도와 도로를 차단했다. 수로도 봉쇄했다. 명분은 새 통화가 소련 점령지구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소련은 동시에 4개 연합국 공동관리위원회에서 탈퇴하고, 24일부로 4대국의 베를린 행정위원회 폐지와 베를린에 대한 서유럽 연합국의 통치권 무효를 선언했다. 사실상 소련이 베를린을 점령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스탈린은 서방 3개국이 서베를린을 포기할 것으로 믿었다. 소련은 대대적인 선동선전 전술을 펼쳤으며, 곧 소련군이 서베를린에 진주한다는 루머가 돌았다.

 

▲ 베를린 분할/위키피디아

 

하지만 곧 스탈린의 전략이 오판이었음이 드러났다. 소련은 200만 베를린 시민들의 목줄을 조이면 서방 군대가 철수할 줄 알았다. 하지만 당시 서베를린에 미군 9,000명, 영국군 7,600명, 프랑스군 6,000명등이 주둔했고, 서독지역에 미군이 55만명 주둔했다. 언제라도 전쟁이 벌어질수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소련군은 서베를린으로 군대를 진주시킬 수 없었다.

이때 미국의 해리 트루먼(Harry Truman) 대통령은 서베를린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이날부터 영미 연합군은 하늘길을 이용해 서베를린 지역에 물자를 공수하기 시작했다. 7월에 소련이 동베를린에 주둔한 병력을 40개 사단으로 증파하자, 미국은 폭격기를 영국군 주둔지에 파견했다. 아울러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에 대한 경제제재를 가했다.

 

▲ 1948년 서베를린 주민들이 템펠호프 공항에 착륙하는 서방 수숭기를 지켜보고 있다. /위키피디아

 

이후 연합군의 대규모 공수작전이 계속돼 1,000여 대의 수송기가 수시로 오가며 매일 2,000톤의 물자를 공급했다. 이듬해 9월30일까지 15개월 동안 연합국에서 금액으로는 2억2,400만 달러, 무게로는 232만톤의 물자를 비행기로 수송했다. 주요 수송물자는 식량, 연료, 기계, 생활필수품이었고, 이중 전체의 3분의2가 석탄이었다고 한다. 철도로 날라야 할 석탄을 비행기로 나른 것이다. 수송기의 이륙 횟수만 27만7,264회에 달했다.

이 작전 수행 과정에서 어느 조종사가 자신의 주머니에 있던 초콜릿과 사탕을 손수건에 싸 공중에서 투하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화제가 되었다. 이후 연합군은 일명 '군것질 작전(Operation Little Vittles)'을 펼쳐 어린이들을 위한 초콜릿과 사탕, 건포도 등의 간식거리를 낙하하면서 서베를린 시민들의 환호와 지지를 받았다.

결국 소련은 이듬해 1949년 5월 12일 베를린 봉쇄를 풀었고, 공식적으로는 9월 30일 완전해제했다.

 

이후 1949년 9월 미국·영국·프랑스의 3개국 점령지구가 통합해 서독 연방공화국이 수립되었고, 한 달 뒤 10월에 소련 점령지구에서 동독 정권이 선포되었다. 독일은 분단되었고, 세계는 동서 냉전체제로 돌입했다.

분단이 되었지만, 동베를린 지역 주민들이 연이어 서베를린 지역으로 탈출하자, 1961년 8월 동독 정부는 베를린 장벽을 쌓아올렸다.

 

▲ 연합군 수송기의 주요 공급기지였던 베를린 템펠호프국제공항에 세워진 베를린 공수작전 기념비.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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