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6 오늘] 카이사르, 로마 주도권 장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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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6 오늘] 카이사르, 로마 주도권 장악하다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9.25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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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루살루스 전투서 폼페이우스 괴멸…베누스 신에게 감사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기 46년 전 9월, 로마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의 전공을 기리기 위한 성대한 개선식이 열렸다. 그의 숙적 폼페이우스(Gnaeus Pompeius)의 개선식이 이틀간 열린데 비해 카이사르의 개선식은 열흘간 성대하게 열렸다. 카이사르가 승리한 나라가 네 나라에 이르렀기 때문에 개선식도 네 차례 진행되었다.

첫 번째 개선식은 갈리아(지금의 프랑스)에 대한 승리를, 두 번째 개선식은 이집트에 대한 승리를, 세 번째는 폰투스(소아시아, 지금의 터키)에 대한 승리를, 네 번째는 누미디아(아프리카)에 대한 승리를, 각각 기념했다.

개선식 행사 마지막 날인 BC 9월 26일, 카이사르는 자신의 이름을 딴 카이사르 광장에 세워진 베누스 신전을 찾았다. 베누스(Venus)는 영어로 읽으면 비너스로, 미(美)와 사랑의 여신이다. 그리스 신화에선 아프로디테에 해당한다.

베누스 여신은 율리우스 가문의 상징적 신이다. 카이사르는 귀족 집안인 율리우스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율리우스 씨족은 베누스 여신의 아들이라는 전설상의 트로이 왕자 아이네아스의 아들 율루스의 후손이라고 자칭했다.

카이사르는 2년전 폼페이우스와의 결전을 벌였던 파루살루스 전투(Battle of Pharsalus)에서 승리한후 가문의 신 베누스에게 영광을 돌리고 신전을 지어주겠다고 공언했다. 신전은 카이사르의 지시로 건축되었다. 신전에는 베누스 여신은 물론 카이사르와 이집트 클레오파트라 여왕도 조각되어 있었다.

 

▲ 카이사르 개선식 /위키피디아

 

그리스에서 벌어진 파르살루스 전투는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 군을 괴멸시키고, 로마 주도권을 장악한 전투였다.

개선식 2년전인 BC 48년 8월 9일, 그리스 테살리아 지방의 파르살루스 평원에 카이사르 군대와 폼페이우스파 군대가 대치했다. 병력은 폼페이우스가 절대적으로 우세했다. 품페이우스에겐 중무장 보병 4만7,000명, 기병 7,000명이 가담했고, 카이사르 진영은 중무장 보병 2만2,000명, 기병 1,000명에 불과했다. 보병 수로는 2대1, 기병 수로는 7대1이었다. 고대 전투는 기병이 좌우했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카이사르군에겐 군선이 부족해 병참이 끊어지고 식량 조달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카이사르 군대는 고참병으로 불리는 베테랑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카이사르와 함께 수년간 갈리아 전투에 참여해 전투경력이 붙은 병사들이었다.

 

▲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 5권 그림

 

이날 전투에 관해서는 일본인 작가 시오노 나나미가 쓴 「로마인이야기」 제5권 ‘율리우스 카이사르(하)’ 편에 자세히 실려 있다.

시오노 나나미에 따르면, 전투 당일 카이사르가 선제공격에 나섰다. 폼페이우스는 부하 트리아리우스가 제안한 작전에 따라 중무장 보병을 출동시키지 않았다. 카이사르의 중무장 보병이 달려오는 과정에서 지치게 해 전열을 흩어 놓을 심산이었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베테랑들은 폼페이우스의 계략을 간파했다. 카이사르의 베테랑들은 도중에 진격을 멈추고 호흡과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돌격했다. 폼페이우스의 중장보병은 그럭저럭 카이사르 보병의 공격을 잘 견뎌내었다. 곧 출동된 폼페이우스 기병 7,000명은 배후로 돌아 들어가기 위해 치고 나왔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기병은 폼페이우스 기병의 배후를 포위하고 고립시켰다. 폼페이우스 기병대는 고립되어 무력화되었다.

카이사르의 최정예 보병들은 오른쪽에서 폼페이우스군의 배후로 돌아 들어갔고, 카이사르는 남겨 두었던 예비병력까지 가담시켰다. 폼페이우스군은 처음에는 잘 막아냈으나 시간이 갈수록 진영이 무너졌다. 폼페이우스는 진영이 돌파당하자 급히 말을 타고 라리사로 도망쳤고 폼페이우스군은 무참히 무너졌다. 가까운 언덕으로 도망친 폼페이우스의 패잔병들은 카이사르의 포위공격에 모두 투항했다.

▲ 시오노 나나미의 '로미안이야기' 5권 그림

파르살루스 전투의 결과는 카이사르의 압승이었다. 카이사르 쪽의 전사자는 200명뿐이었으나 폼페이우스 쪽은 1만5,000명이 전사하고, 2만4,000명이 포로로 잡혔다.

폼페이우스는 그리스에서 퇴각해 로도스 섬을 거쳐 이집트로 들어갔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건너가 다시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이집트의 왕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게 의탁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는 이미 카이사르에게 기울었고 폼페이우스는 BC 48년 9월 29일 자신의 58번째 생일날, 이집트에 상륙하다가 그리스인 아킬라스와 로마병사인 셉티무스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로써 카이사르는 로마의 유일한 권력자가 되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이야기 5권에서 이렇게 썼다. (p206)

"12년 전인 기원전 60년. 당시 46세였던 폼페이우스와 40세인 카이사르는 ‘삼두정치’를 결성한 동지였다. 이듬해인 기원전 59년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카이사르는 수도 로마를 폼페이우스에게 맡기고 갈리아로 떠났다. 갈리아로 떠나기 전에 써둔 카이사르의 유언장은 사위인 폼페이우스를 상속인으로 지정했다.

그러나 동지관계를 맺은지 7년이 지날 무렵부터 폼페이우스는 카이스르와 멀어졌고, 결국에는 반카이사르파의 등에 업혀 과거의 동지와 적대하는 사이가 된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자,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를 탈출했고, 파르살로스 회전에서 참패한 뒤 이집트로 도망쳤다가 목숨을 잃었다. 이 것이 여섯 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로마 최고의 두 장군이 마지막 2년간 겪은 운명이었다.“

 

▲ 로마 카이사르 포럼의 베누스 신전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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