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2 오늘] 오스만의 유럽 확장 저지한 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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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2 오늘] 오스만의 유럽 확장 저지한 빈 전투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9.11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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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리투아니아, 신성로마제국 영주들이 연합해 이슬람에 대항

 

터키는 1923년 공화국 수립 이후 유럽 편입 정책을 시행해왔다. 그 일환으로 EU 가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왔다. EU 집행위원회도 1999년 10월 터키에 대해 가입자격을 부여하기로 했다. 하지만 20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터키는 EU에 가입하지 못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결사 반대 때문이다. 오스트리아의 주장인즉, 터키는 유럽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구원(舊怨)이 있다. 16세기와 17세기 오스트리아 수도 빈이 두차례나 오스만 투르크에 의하 포위 공격을 받은 사건이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수세기의 세월이 지나도록 아시아의 무슬림국가가 저지른 일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1683년 9월 12일, 총사령관을 맡은 폴란드왕 얀 3세 소비에스키(John III Sobieski의 기병대가 오스트리아 수도 빈(독일어 Wien, 영어 Vienna) 외곽을 두달째 포위하던 오스만 투르크 군을 공격했다. 소비에스키의 지휘를 받는 카톨릭 연합군은 폴란드-리투아니아 기병대, 신성로마제국의 작센, 바이에른, 바덴, 스와비아의 독일군, 폴란드의 지배를 받던 우크라이나의 코사크 기병대가 참가했다.

동이 트기 전인 새벽 4시에 시작된 이날 전투는 해가 저물도록 전개되었다. 카톨릭과 이슬람의 이 역사적인 전쟁은 저녁 무렵에 투르크군이 퇴각하면서 막을 내렸다.

이날 전투는 300년에 걸친 합스부르크와 오스만 전쟁의 정점을 기록했다. 이 전투 이전에는 유럽의 맹주였던 합스브루크가가 밀렸다면, 그 이후부터 오스만투르크가 동유럽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역사에서는 이를 빈 전투(Battle of Vienna)라고 한다. 앞서 1529년 오스만 제국은 오스트리아 수도 빈을 점령하기 위해 포위공격을 했다가 실패했는데, 이를 빈 공성전(Siege of Vienna)이라고 한다. 투르크는 150년 사이에 두차례 빈을 공격해 실패함으로써 유럽에서 밀려나게 된 것이다.

 

▲ 빈을 포위한 오스만 투르크 군 /위키피디아

 

1683년의 빈 전투는 오스만 투르크의 총리격인 카라 무스타파 파샤(Kara Mustafa Pasha)의 강경론에 오스만 술탄이 받아들이면서 시작되었다. 마침 합스부르크 영지인 헝가리의 신교도들이 반란을 일으키며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요청했다.

1683년 7월 14일 무스타파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의 15만 대군이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 빈에 도달했다. 무스타파는 바로 빈 성채를 포위했다. 장기전을 펼칠 계획이었다. 오스만 군은 150년전의 공방전 때보다 충분한 물자를 준비해 갔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국력은 30년 전쟁의 후유증으로 피폐해져 있었다. 빈의 주둔군은 1만1,000여명, 자원병 5,000여명으로 절대적인 병력이 모자랐다. 하지만 합스부르크는 빈을 끝까지 방어하기로 했다.

병력수로 10대1의 전투였다. 시간은 오스만 투르크의 무스타파 파샤에 유리할 것처럼 보였다. 오스만은 빈을 포위해 군대와 시민들을 굶겨죽일 작정이었다. 무스타파 파샤는 빈을 고스란히 넘겨받으려 했다. 무리한 포 사격으로 빈을 파괴하고 값진 물건을 손상시키기 싫었다. 절대 우위의 병력으로 작은 전투를 시도해 오스트리아 군대를 피로하게 하고, 물자공급을 차단해 스스로 항복하게 만든다는 작전이었다. 230년전인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켰을 때처럼 포격으로 성채를 구멍내는 일에 집중했다. 이때도 이교도 노예병인 예니세리를 전방에 내세웠다.

 

▲ 1683년 오스만 투루크의 지배영역 /위키피디아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인 레오폴트 1세(Leopold I)은 로마 교황청과 카톨릭 국가에 메시지를 보내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호소했다. 레오플트 1세의 호소는 먹혀 들어갔다. 카톨릭 진영에서는 콘스탄티노플에 이어 빈마저 이슬람에 함락되면, 그다음 중유럽, 서유럽이 이슬람에 짓밟힐 것을 우려했다. 교황청이 자금을 대겠다고 나왔고, 신성로마제국의 영주들,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이 지원에 응했다. 이때 프랑스 루이 14세는 이 기회에 알사스-로렌을 빼앗을 생각에 참전을 거절했다.

어쨌든 이슬람에 대항하는 카톨릭 연합군이 형성되었다. 레오폴드 1세는 빈 수비군에게는 지원군이 올 때까지 저항하라고 지시했다. 수비군은 오스만 군의 포격에 도시가 불타는 것을 막기 위해 외곽의 가옥을 모두 헐었다.

빈의 수비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의 교훈으로 오스트리아도 포를 많이 준비했다. 오스만의 포가 130문인데 비해 빈 수비군이 보유한 포는 370문이었다. 두달간의 포위 공격에도 오스트리아 군은 버텨냈다.

하지만 언제 올지 모르는 지원군을 기다리며 소수 병력으로 저항하면서 저항군의 사기가 떨어져 갔다. 빈 시민들은 물자난으로 인해 극심한 고생을 했다. 8월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요새 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방어군과 시민들의 굶주림과 피로는 심해졌다. 경계 근무시 졸면 총살한다는 명령도 역부족이었다.

9월초 드디어 구원부대가 빈 근처에 도착했다는 희소식이 날라왔다. 오스만군도 그 소식을 들었다. 오스만은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빈을 함락하기 위해 총공세를 퍼부었다. 오스만군은 포격으로 성채를 무너뜨리는 작전과 동시에 빈 시내로 연결하는 갱도를 파는 작업을 실시했다. 요새 벽이 무너져 12m의 틈이 생겼고 오스만군은 이를 통해 요새 내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방어군은 사력을 다해 저항했으나 9월 8일 오스만군은 빈 시내 일각을 점령했다. 방어군은 시가전으로 전환할 태세를 갖췄다.

 

▲ 빈 전투도 /위키피디아

 

드디어 9월 6일 폴란드 국왕 소비에스키이 이끄는 군대가 다뉴브강을 건넜다. 소비에스키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카톨릭의 신성 연맹(Holy League) 군대는 빈을 포위하고 있던 오스만군을 후방에서 공격했다.

신성연맹의 군대는 오스트리아군을 합쳐 총 9만명으로, 오스만 군의 병력보다 적었다. 하지만 기병에서는 카톨릭 연합군이 우세했다. 카톨릭 연합군의 기병은 1만8,000명, 역사가들은 이 전투가 인류역사상 최대의 기병전으로 기록하고 있다.

특히 폴란드의 후사르(Hussars) 기병대는 뛰어난 전공을 세웠다. ‘날개달린 후사르’(Winged Hussars)라는 별명을 가진 기병대는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영토를 우크라이나까지 넓히는 주력으로 활동했다. 여기에 폴란드가 동원한 코사크 기병대도 오스만군을 떨게 했다.

9월 12일 하루 내내 전개된 전투는 막상막하로 진행되었지만, 오후가 되면서 조금씩 오스만군이 밀리기 시작했다. 오후 6시 소비에스키는 기병대에 무스타파의 본영을 공격하라고 명령을 하달했다. 오스만군은 마침내 퇴각했다. 소비에스키 왕은 로마시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말을 회상하며, “왔노라, 보았노라, 그리고 정복했노라”(Veni, vidi, Deus vicit)고 선언했다.

 

당대 오스만 투르크의 역사학자 실라다르 아가(Silahdar Agha)는 이날 전투를 1299년 건국 이래 오스만 제국의 가장 큰 패배라고 규정했다. 오스만군은 이 전투로 2만을 잃었고, 5,000명이 포로로 잡혔다. 오스만군은 군대는 퇴각했다. 무스타파 파샤는 그해 12월 25일 처형당했다.

그후 17년에 걸쳐 합스부르크는 오스만과의 전투에서 연전연승했고, 이로써 헝가리를 손에 넣게 되었다. 이 전투의 실제적인 승전국인 폴란드는 오스만에 빼앗겼던 포돌리아를 되찾고 동유럽의 강자로 군림했다. 유명무실했던 신성로마제국이 그후 1세기 동안 수명을 연장하게 된 것도 이 전투 덕분이었다.

무엇보다도 오스만 투르크가 이 전투후에 쇠약해져 동유럽에서 퇴각해 그리스로 물러났고, 서유럽은 더 이상 이슬람의 공격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후일담…크루아상, 베이글, 커피하우스

 

① 빈 전투에서 오스만군이 성벽 아래로 갱도를 파면서 화약을 폭파시켰는데, 어느 제빵사가 지하실에 밀가루를 가지러 갔다가 폭파음을 듣고 수비군에 알려 오스만의 갱도 건설를 좌절시켰다. 이에 제빵사는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 영예로운 문장을 받게 되어 문앞에 내 걸게 되었다. 이 제빵사는 오스만군을 축출한 영광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투르크의 상징인 초승달(crescent) 모양의 빵을 만들었다. 이 빵을 먹으면서 오스만을 씹어먹는 기분을 느끼자는 것이다. 이 빵이 크루아상(croissant)의 유래라고 한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 국왕에게 시집을 가 빈 궁정에서 먹던 빵이 그리워 가져오게 해 크루아상이 파리에서 유명해졌다고 한다.

② 빈의 제빵사들은 폴란드 군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만든 것이 베이글(bagel)의 시초라고 한다. 폴란드 기병대의 말 등자를 본떠 만든 것이라는 설이 있다.

③ 오스만 군은 당시 커피를 즐겼는데, 퇴각하면서 다수의 커피를 놓고 도망쳤다. 이를 가져간 오스트리아의 커피업자가 커피하우스를 만들어 팔았는데, 이 것이 최초의 커피하우스란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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