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와 장자, 세계도자기축제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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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와 장자, 세계도자기축제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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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7.29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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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낙규의 "철학, 축제에 빠지다" <5회>분청사기와 조선백자

분청사기(粉靑沙器)란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의 줄인 말로 고려 말에서 임진왜란 30~40년 전까지(1392~1592년경) 만들어진 도자기다. 분청사기의 흙은 고려청자와 같은 일반점토질이다. 철분이 섞여 거친 겉면을 하얀분(백토)으로 분장했다고 해서 분청사기로 불린다.

북송 말기 태평노인(太平老人)은 '수중금(袖中錦)'이란 책에서 "고려청자의 비색은 천하제일"이라고 칭송했다. 그 칭송대로 고려청자는 세계 최초로 도자기에 상감을 함으로써 미적인 면에서나 기술적인 면에서 절정을 이뤘다.

 

▲ 경기 이천시 설봉공원에 있는 곰방대가마의 벽화를 그리는 작가. 곰방대가마는 한국의 전통 물레성형도구인 곰방대와 오름가마를 닮은 모양으로 2001년 세계도자기엑스포 개최 당시 만들어졌다. /사진=강낙규

14세기말 몽고 침입의 여파와 해안지역 왜구의 출몰로 고려청자를 생산하던 강진, 부안 지역이 초토화됨으로써 가마는 내륙지방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 이에 따라 흙의 질이 강진과 부안에 비하여 떨어져, 그대로 구우면 도자기가 거무튀튀하고 누르스름해져 하얀 백토로 분장하게 된다.

형태와 장식 면에서 청자가 귀족적이며 섬세한 반면 분청은 서민적이며 소박하고 해학적인 분위기를 가진 도자기다. 문양은 크게 과장된 표현 때문에 약간 기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사물을 묘사함에 있어 어떠한 방식이나 규범에 구애받지 않은 즉흥적인 표현이 보는 사람들마저도 자유롭게 한다. 마치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편에 나오는 '붕(鵬)'이란 거대한 새가 구만리 창공을 날아 수천리 남쪽바다로 날아가는 무한한 자유로움을 떠오르게 한다.

분청사기는 지역별로 특징이 있는데 충청도에서는 귀얄분청자, 전라도에서는 덤벙분청자, 경상도에서는 담금분청자가 대표적이다. 이중 경상도 담금분청자는 철분이 많은 '핑크C 카오링'이라는 정제가 덜 된 백자의 태토로 만들어 백자로 분류될 수 있으나 여기서는 그 형태와 도자기발전 과정상 분청사기로 분류하기로 한다.

조선시대에는 내세추구적인 불교 대신에 현실치중적인 신흥사대부와 유교사상의 등장으로 생활그릇도 질박하고 검소함을 추구함에 따라 분청사기가 발원하게 되었다.

15세기전반에는 무늬를 도장으로 새겨서 찍는 인화분청자가 주류를 이루다가 점차 하얗게 분장한 면 위에 철화(산화철을 주 안료로 하고 보조제와 혼합하여 붓으로 문양을 그리는 기법), 선각(선으로 그림이나 무늬를 새김), 박지(표면에 조각을 한 후 필요 없는 부분을 긁어 냄) 등 다양한 기법을 사용하게 된다.

충청지방의 귀얄분청자는 청자와 같은 바탕흙에 돼지털을 묶은 솔로 백토분장을 한 후 철분이 있는 안료로 그림을 그려 철화분청자를 생산하였다. 전남지방에서는 덤벙분청자를 생산하였는데, 도자기를 백토가 있는 물에 덤벙 넣었다가 건져낸다고 덤벙분청자로 부른다. 경상도지방의 담금분청자는 정선되지 않아 모래 성분이 흙에 섞여 있으며 정제되지 못한 유약을 발랐다.

충청도의 도자기는 종가집 큰며느리, 전라도는 새각시, 경상도는 촌머슴, 경기도는 예쁜 기생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경상도지방의 담금분청자는 그 재현 과정과 아름다움 그리고 사용 목적 등에서 많은 논란을 일으킨다. 담금분청자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일본의 민속예술가이자 문예평론가였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잡기론(雜器論)'과 일본 국보로 선정된 이도다완(井戶茶碗)을 통해 살펴본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일본 대덕사에 소장되어 있는 16세기말 조선에서 만든 이도다완을 보고 이렇게 썼다.

“어디를 찾아보아도 이보다 더 평이한 기물은 없다. 무엇하나 장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어디 한 군데 꾸민 데가 있는 것이 아니다. 전형적인 잡기(雜器)다. 흙은 뒷산에서 퍼온 것이다. 유약은 노에서 퍼온 재다. 물레는 축이 흔들거린다. 아무렇게나 깎아낸 그릇이다. 손에는 흙이 묻은 채다. 유약이 쏟아져 고대에 묻기도 했다. 방은 어둡고 사기장은 문맹이다. 이것이 천하의 명기, 대명물의 정체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좋은 것이다.”

“이것은 한(恨)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애상(哀想)의 미(美)다”

“그릇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모르는 그릇은 너희 말처럼 막사발이다.”

그는 “더러운 조선의 잡기에서 미(美)를 발견하여 천하의 명물로 승화시킨 우리 일본인의 심미안은 위대하다”며 이른바 조선의 '막사발'에 대해 찬양과 비하를 동시에 했다.

하지만 이미 김정희, 오경석, 민영익, 민영환, 오세창, 김용진 등 이 땅의 수준높은 감식가들은 담금분청자의 아름다움을 인식하고 있었다.

영국의 세계적인 도예가 버나드 리치(Bernard Leach)는 “속물적 근성이 없는 자연스러움의 극치”라고 찬양하고 있다.

우리는 도자기그릇을 그냥 막사발로 부르는데, 담금분청자와 막사발은 분명히 다른 그릇이다. 막사발은 일제시대 오지마을에서 질이 나쁜 흙에 유약과 물토로 성형해서 만든 하얀 백사기를 말하는 것이다.

일본의 일부 학자가 우리 사발을 비하하기 위해 쓴 용어를 그대로 따라 쓴 것으로 16세기 경상도지방에서 생산됐던 담금분청자와는 분명히 구분하여 사용해야 할 것이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이도다완 즉 경상도지방에서 생산된 담금분청자가 대충 얼레설레 만들어진 것으로 주장하고 있으나, 1968년 신정희 선생이 이를 재현해낸 과정을 보면 쉽지않은 공이 들었다.

신정희 선생은 담금분청자를 재현하기 위해 가산까지 탕진했으나 담금분청자에 나타나는 특유의 유방울(사발의 굽 부분에 유약이 올록볼록하게 이슬처럼 맺힌 것)이 맺히지 않아 낙담하던 차에 한 노인으로부터 "묵보래(백색의 점토)에다 느릅나무 태운 재를 섞으면 유약이 투명해진다"는 얘기를 듣고 그대로 해본 끝에 마침내 담금분청자 재현에 성공했다고 한다.

이 유방울을 일본인들은 우연히 만들어졌다고 주장하지만 그렇지 않다. 불이 약하면 유방울이 선명하나 그릇이 다 익지 않고, 불이 강하면 유방울이 녹아 없어진다. 유방울은 흙, 유약, 불때기의 전 과정에 과학적인 절차와 온 몸의 정성이 합쳐진 조선 사기장의 창작행위의 결과물인 것이다.

이도다완은 네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이도의 약속’이라 부른다.

첫째 굽의 형태가 높고 좁다.(일반 밥그릇은 굽이 낮고 넓다)

둘째 비파색(노란색, 살색)으로 놋그릇의 노란색을 흉내 낸다.

셋째 굽 부분에 이슬 같은 유방울이 있다.

넷째 물레선이 강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이도다완의 용도가 무엇인가는 아직까지도 의문에 싸여 있다.

도예가 신한균은 용도를 제기(祭器)로 주장한다. 그 근거로 굽이 높기 때문에 밥을 먹다가 엎어질 수 있어 일반 식기가 아니며, 조상을 위한 그릇인 제기이기 때문에 수명이 다하면 다른 사람이 못쓰게 파손하여 묻어버린다. 이 때문에 어떠한 무덤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기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남의 제기인 이도다완을 찻사발로 사용했기에 조상의 분노를 사서 이 사발로 차를 마신 사람은 역적이 되거나 피부병에 걸려 죽거나 하는 등 말로가 비참했다고 한다.

반면 오랫동안 막사발을 탐구한 소설가이자 시인 정동주는 승려의 식기인 발우라고 주장한다. 굽이 높은 것은 고대 가야토기의 높은 굽과 연관이 있으며 이는 발우 굽의 요건이고, 비파색은 깨달음의 경지를 상징하는데 남방불교 승려의 옷이 바로 이 색이다. 강한 물레자국은 만다라를 상징하여 깨달음의 원을 시각적으로 보여준 것이라 한다. 그리고 유방울의 맺임은 발우를 놓기 전에 반드시 물을 뿌리고 그 위에 올려두어야 하는 규율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주장은 도자기를 구울 때 여러 개(주로 7개)를 쌓아 굽는데 우리나라 사발은 지름 16.5cm의 규격으로 만드나 제일 위에 쌓는 사발은 이보다 작은 15.3cm로 한 것인데, 이게 일본으로 건너가 말차를 마시기에 좋아 그렇게 크기가 작은 이도다완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해석이 옳은지는 좀더 연구해 봐야겠지만 다양한 해석으로 우리의 도자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는 것은 바람직하다.

 

조선백자

백자란 백색흙에 투명유를 입혀 높은 온도(1,250~1,300도)에서 구워 만든 자기를 말한다. 청자의 재료는 점토인 흙이지만 백자의 흙은 사실 흙이 아니라 도석이라는 돌을 분쇄한 돌가루다.

고령토는 중국 고령지방의 흙인데 카오링(고령토의 중국 발음을 영어로 표기)은 화이트A, 화이트B, 핑크C 등이 있다. 그런데 철분이 많으면 백색도가 떨어진다. 따라서 철분이 적은 규석이 많이 포함된 찰기있는 점토가 좋은 태토가 되는데 경기도 광주, 양주와 경상도 진주, 사천의 백자 태토가 우수하다.

조선백자는 16세기말에서 19세기까지 분원 가마(관요)에서 빚은 백자를 말한다. 분원 가마는 왕실과 궁중, 중앙관서 등에서 사용되는 도자기를 제작하기 위해 사옹원(司甕院)에서 경기도 광주에 분원을 설치, 도자기를 제작하게 한 것이다. 경기도 광주는 수도인 서울과 가깝고 한강을 이용한 교통이 편리할 뿐아니라, 흙이 뛰어나고 연료인 땔감이 풍부하여 선택됐다.

380명의 사기장이 1년에 1,372죽(1죽은 10개)을 납품했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황폐화됐다가 1675년 숙종 때 정상화된다. 영조28년인 1752년을 전후해 조선백자는 그 전성기를 이루다, 일본의 산업도자 유입으로 일제시대에 완전히 소멸하고 만다.

조선백자가 널리 사용된 것은 정치사회적인 변혁과도 연관이 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정권이 바뀜에 따라 신진사대부들은 새 술은 새 항아리에 담아야 한다며 “지금 우리에겐 귀족의 술상에 오르는 청자 주전자가 아니라 백성들의 밥상에 오르는 실용적인 그릇이 필요하다”며 백자의 생산을 독려한다.

이는 조선사회의 지도적 이념이었던 성리학의 검소검약을 조형의 원칙으로 삼고, 사치스러운 장식보다 간결하고 단아한 조형미가 조화를 이룬 조선백자를 탄생하게 했다.

 

▲ 팔일무(八佾舞)에 맞춰 아악을 연주하는 모습. 팔일무는 조선시대 문묘, 종묘 등에서 열린 제향 때 추던 춤으로 유교 사상이 담긴 의식이다. /사진=강낙규

조선시대 도자기는 분청사기(1392~1592년)에서 백자(1592~1751년) 그리고 청화백자(1751~1910년)로 변천하게 된다.

1994년 '백자청화보상문접시'가 크리스티 경매에서 38만 달러에 낙찰되고, 1996년 10월 '백자철화용문항아리'가 역시 크리스티에서 무려 942만 달러(120억원)에 낙찰됨으로써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이 높아졌다.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의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중국이나 일본보다 백색도가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세계 도자기 평론가들이 더 높은 평가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백색도가 떨어지는 이유는 중국과 일본의 고령토는 돌가루인 반면 우리나라의 고령토는 흙에 가까운 성분이기 때문이다)

눈을 자극하지 않고 자연미를 소리없이 표현하는 인간 중심의 예술, 비뚤어진 항아리에서 나타나는 비대칭의 멋, 선비 정신이 가득한 절제의 미, 그리고 창조적 장인정신을 들 수 있다.

청화백자는 코발트(푸른 안료靑料)로 문양을 새기는 기법인데, 특히 회교국으로부터 수입하는 코발트는 회청(回靑)이라 불렀다. 워낙 귀하고 비싸 문양의 그림은 도화원의 화원이 그렸다. 병자호란 이후 청료의 수입이 금지되자 산화철과 산화동으로 그린 철화백자와 동화백자가 등장하게 된다.

17세기 후반 조선의 성리학이 발전하고 실학이 성립하자 조선의 도자기는 독자적 세계를 지향하게 되고 백자가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18세기 전반인 1720년 무렵 달항아리가 제작되는데, 완전한 원의 형태가 아니고 한쪽이 이지러져 있는 달항아리는 너그럽고 후덕한 느낌을 준다. 이는 두 개의 도자를 아래위로 붙여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후 청료의 수입이 재개되자 본격적으로 청화백자가 생산되기 시작한다. 산수문(山水紋)과 운룡문(雲龍紋)을 주로 그렸는데 격이 높다. 이때 용의 발가락 수는 중국에서는 5개를 그렸으나 조선에서는 왕은 4발가락, 왕자는 3발가락만 그렸다. 명에서 청으로 중국의 왕권이 바뀌자 조선도 왕실에서는 5개, 왕족은 4개, 왕자는 3개의 발가락을 사용하게 된다.

18세기 후반에는 각병, 각항아리, 각접시등이 활발히 제작되었고 양각, 음각, 상형, 투각의 깔끔하고 청초한 조선후기 백자가 만들어진다.

문양도 시대의 변천에 따라 다양한 변신을 한다. 문양마다 각기 재미있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봉황과 기린은 성군의 출현이나 태평성대를, 두 마리 물고기는 부부 금슬과 자손 번창, 세 마리 물고기는 면학(勉學), 잉어는 갖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급제하고자 하는 선비들의 자화상, 쏘가리(鱖)는 장원급제하여 궁궐로 들어감, 목단은 부귀영화, 포도와 석류는 자손의 번창, 박쥐는 복(福), 당초문(唐草紋)은 영원한 생명을 의미한다. <5회 끝>

/강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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