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년만에 제 자리 찾는 신라 두 금귀걸이의 기구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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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년만에 제 자리 찾는 신라 두 금귀걸이의 기구한 사연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8.23 17: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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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황오동 금귀걸이→노서동 금귀걸이로…기존 것은 새로 보물지정

 

문화재청이 이름이 바뀐 신라시대 두 금귀걸이의 명칭을 바로잡기로 결정했다.

문화재청은 이미 보물 제455호로 지정되어 있는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의 이름을 ‘경주 노서동 금귀걸이’로 변경하기로 예고했다. 또 지금까지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로 알려진 금귀걸이에 대해서는 새롭게 보물로 지정예고했다.

문화재청은 보도자료에서 이렇게만 설명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들다.

문화재청 사이트에서 검색하면 23일 현재 ▲보물 454호 경주 노서동 금팔찌 ▲보물 455호 황오동 금귀걸이 ▲보물 456호 노서동 금목걸이로 기재되어 있다. 이중 보물 455호로 표시된 황오동 금귀걸이를 새로 보물로 지정하고, 이 자리에 노서동 금귀걸이를 갖다 놓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련 번호를 가진 세 보물이 일제 강점기인 1933년 경주읍 노서리 215번지에서 비슷한 시기에 발굴되었음이 인정되는 것이다.

그러면 왜 노서동 금귀걸이 자리에 황오동 금귀걸이가 차지하고 있었을까. 여기에 두 금귀걸이의 기구한 사연이 숨어 있다.

 

▲ 운명이 뒤바뀐 두 금귀걸이. 왼쪽이 노서동 금귀걸이, 오른쪽이 황오동 금귀걸이 /문화재청

 

1933년 경주읍 노서리 215번지에 살던 김덕언씨가 자기집 토담을 따라 호박씨를 뿌리려고 땅을 파헤치다가 금붙이들을 발견했다. 신라시대에 제작된 금제품이었다. 김씨가 수습한 유물은 금귀고리 1점, 은팔찌 1쌍, 금·은반지 각 1점씩, 금구슬 33알이었다. 한쌍으로 된 금귀걸이 가운데 다른 1점은 찾지 못했다. 그 곳은 경주 노서리 215호 고분으로 지정되었다.

조선총독부 고적조사팀에 소속된 일본학자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가 김씨가 발견한 유물들을 찬찬히 들여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쌍으로 되어 있어야 할 귀고리의 다른 한쪽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사팀은 본격적인 발굴에 들어가 나머지 금귀고리 1점과 금구슬 44개 등 유물을 더 찾아 냈다.

따로 발굴된 금귀걸이 한쌍은 재회하자 곧바로 별거에 들어갔다. 이듬해인 1934년 김덕언씨가 수습한 1점은 서울(조선총독부 박물관)로, 아리미쓰가 찾아낸 반쪽은 현해탄을 건나 동경박물관으로 각각 이송됐다.

 

해방이 되고 한일협정에 따라 1966년 5월 28일 동경에 있던 노서리 금귀걸이 반쪽도 서울로 돌아와 나머지 짝과 만나게 되었다. 헤어진지 32년만이다.

이듬해인 1967년 6월 21일 문화재위원회는 노서리 215호 고분에서 함께 출토된 3점을 보물로 지정했다. 금팔찌(454호), 금귀걸이(455호), 금목걸이(456호)에 일련의 번호가 매겨졌다. 일제에 의해 이산가족이 되었던 보물은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그 가치가 인정된 듯 싶었다.

그런데 여기서 문화재 당국의 실수가 발생했다. 보물을 저정한후 출간한 각종 자료에 경주 노서동에서 발굴된 금귀걸이가 아니고, 1949년 경주 황오동 52호분에서 출토된 금귀걸이 사진을 실은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노서동 금귀걸이와 황오동 금귀걸이는 비슷하게 생겼지만, 엄밀하게 보면 황오동 금귀걸이는 보다 세련되게 가공되었다. 노서동의 것은 수수한 반면에 황오동의 것은 예쁘고 단정한 모양이다. 노서동 귀걸이는 보다 예쁜 황오동 귀걸이에 밀려난 것이다.

 

▲ 41년만에 보물 455호의 제자리를 찾아가는 노서동 금귀걸이 /문화재청

 

이 뒤바뀐 운명을 바로잡은 사람은 일본인이다. 2000년 어느날 일본학자 후지이 가즈오(藤井和夫)가 이한상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사에게 이의를 제기했다. 그 무렵 국립중앙박물관은 신라 황금전 특별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후지이는 “1998년 발표한 이한상 학예사의 논문에 언급된 보물 455호는 ‘노서리 금귀고리’가 아니다”고 지적했다.

이 학예사는 깜짝 놀라 과거 발굴 당시의 자료를 들여다 보니, 보물 455호로 지정된 금귀걸이가 황오동 금귀걸이고, 노서리의 것은 아님을 발견했다.

32년간 헤어진 금귀걸이 한쌍은 보물지정후 다시 33년간 다른 귀걸이에게 보물자리를 내준채 박물관 수장고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보물이 뒤바뀌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도 9년이 걸렸다. 2009년 10월 20일 문화재위원회가 열려 뒤바뀐 운명의 주인공을 바로잡자는 논의가 이뤄졌다.

하지만 노서리 귀걸이의 명예는 되찾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황오동에서 발굴된 금귀걸이를 보물 455호로 인식하고 있는 상황이므로, 황오동의 것을 그대로 보물 455호로 하자고 했다. 결국은 문화재위원회가 노서리 귀걸이의 보물지위를 박탈하고, 황오동 귀걸이를 보물 455호로 변경, 지정한 것이다.

 

지난해 이 문제가 다시 거론되었다. 보물 지정 당시와 현재의 대상 유물이 다르다는 지적이 다시 제기된 것이다. 그러자 문화재청은 올해 3월 자문회의와 문화재위원회 논의를 거쳐 보물 지정 경과를 다시 확인하고, 두 금귀걸이에 대한 문화재 가치를 재평가하기로 했다.

노서동 금귀걸이는 올해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보물 비지정이라는 꼬리표를 단채….

 

▲ 보물 455호 자리를 차지했다가 새로 보물로 지정되는 황오동 금귀걸이 /문화재청

 

문화재청이 마침내 운명이 뒤바뀐 두 금귀걸이에게 제자리를 잡아주기로 결정했다. 1933년 노서동에서 발굴된 금귀걸이는 보물 455호 자리로 가고, 보물 455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황오동 금귀걸이는 새로 보물로 지정키로 한 것이다.

문화재청은 “보물 455호에 대한 명칭 변경은 1966년 일본에서 환수된 ‘경주 노서동 금귀걸이’임에도 불구하고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로 인식되어 온 것에 대해 바로잡는 조치”라고 설명했다.

남의 자리를 차지했다가 새로 보물로 지정되는 절차를 밟기는 하지만, 황오동 금귀걸이도 뛰어난 우리 조상의 보물임은 분명하다.

황오동 금귀걸이는 1949년 경주 황오동 52호분에서 출토된 귀걸이 한 쌍으로, 외형상 주고리(主環), 중간장식, 마감장식의 삼단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신라 시대 5~6세기에 해당하는 유물이다.

접합 부위가 매우 세밀해 육안으로 잘 확인되지 않을 만큼 세공 기술이 뛰어나고 작은 구슬 장식도 매우 섬세하고 아름답다. 또한 입체형인 펜촉형 장식물 안팎으로 작은 금알갱이를 촘촘하게 부착해 시각적인 화려함을 증대시키고 있다.

이 귀걸이는 신라 시대 경주에서 만든 전형적인 귀걸이 형태라는 점, 제작기법과 조형성이 우수하고 펜촉형 장식물의 창의적인 형태와 입체감이 돋보이는 점 등에서 신라 고분 금속공예품의 대표작으로 꼽을 만하며, 신라 장신구의 발전과 변화를 고찰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노서동 금귀걸이와 황오동 금귀걸이는 신라 시대 장신구로 대표적인 작품이다. 명칭변경 및 보물지정이 예고된 두 금귀걸이는 30일간 각계의 의견을 수렴·검토하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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