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3 오늘] 스코틀랜드 독립 영웅 윌리엄 월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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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3 오늘] 스코틀랜드 독립 영웅 윌리엄 월리스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8.22 12: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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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요로, 전설로 내려오는 민중의 지도자…영화 ‘브레이브 하트’ 주인공

 

1995년에 만들어진 헐리웃 영화 ‘브레이브하트’(Brave Heart)에서 주연배우 멜 깁슨은 스코틀랜드 1차 독립전쟁(1296.3.26.~1328.5.1.)의 영웅 윌리엄 월리스(William Wallace) 역을 맡았다. 윌리스는 독립전쟁에서 잉글랜드 군에 잡혀 1305년 8월 23일 처형되었다.

영화의 스토리는 13세기 말 잉글랜드의 전제 군주인 롱섕크의 탄압을 받고 있던 스코틀랜드에서 윌리엄 월리스(멜 깁슨)가 민중의 지도자가 되어 잉글랜드와 전쟁을 벌인다. 위협을 느낀 잉글랜드 왕 롱섕크는 월리스에게 휴전을 제의하고, 화해의 사절로 이사벨 공주(소피 마르소)를 파견한다. 이 만남에서 이사벨 공주는 월리스에게 사랑을 느끼고, 잉글랜드의 계략을 월리스에게 알려 준다. 그러나 월리스는 저항군의 배신으로 전투에 패해 포로가 되어 런던에서 공개 처형을 당한다. 월리스의 죽음에 고무된 스코틀랜드는 그의 숭고한 정신을 받들어 베노번 전투에서 잉글랜드에 승리를 거둔다는 줄거리다.

 

▲ 영화 ‘브레이브하트’의 장면 /네이버영화

 

월리스는 실존인물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영화 ‘브레이브하트’는 그가 죽고 172년후에 쓴 블라인드 해리(Blind Harry)가 쓴 전기를 기초로 했기 때문에 역사라기보다 소설에 가까운 내용이다. 분명한 것은 스코틀랜드 민중들 사이에 월리스는 영웅이고, 그에 관해 관한 어떤 과장도 사실로 믿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민중 영웅이 그러하듯, 월리스의 출생연도와 어린 시절에 관해서는 분명한 게 없다. 전설에 따르면, 월레스는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을 몰고온 잉글랜드 치안대장을 살해하고, 그의 사지를 절단하면서 잉글랜드에 대한 복수극을 시작한다.

 

▲ 스코틀랜드 에버딘의 월리스 상 /위키피디아

 

그 무렵 스코틀랜드 왕은 알렉산더 3세(King Alexander III)였다. 알렉산더 3세는 20년간 통치하면서 잉글랜드의 침공을 잘 막아냈지만, 1286년 낙마 사고로 급사했다. 불행하게도 그에게는 1명의 공주와 2명의 왕자가 있었는데, 모두 일찍 죽었다. 유일한 후손은 맏딸이 노르웨이 왕에게 시집가서 낳은 마가렛이란 세살배기 외손녀였다.

스코틀랜드 영주들은 알렉산더 3세의 유일한 혈통인 마가렛에게 임금자리를 맡기고 대리인을 내세워 섭정통치를 했다.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가 이 틈을 노렸다. 에드워드 1세는 아들 에드워드 2세를 마가렛과 약혼시켰다. 하지만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4년후인 1290년 어린 마가렛이 노르웨이에서 스코틀랜드로 가던 도중에 사망했다.

스코틀랜드 왕가의 정통 혈통이 끊어지면서 14명의 왕위 후보자가 사돈의 팔촌까지 거명하며 난립했다. 이중 존 베일리얼(John Balliol)이라는 자가 잉글랜드 왕의 지지를 얻어 스코틀랜드 왕에 올랐다. 조건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를 스코틀랜드 최고영주로 대우해주는 것인데, 이는 사실상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의 속국임을 인정하는 조치였다.

1292년 스코틀랜드 왕에 즉위한 베일리얼은 이내 마음이 변했다. 잉글랜드 국왕은 베일리얼의 조치에 대해 사사건건 런던에 와서 설명하게 하고, 영토의 일부를 떼어 갔다. 잉글랜드는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면서 병력을 지원하라고도 요구했다.

그러자 스코틀랜드 왕 베일리얼은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와 비밀 동맹을 맺고 잉글랜드 북부를 공격했다. 하지만 패전했다. 1296년 베일리얼은 재위 4년만에 폐위되고 런던탑에 유폐되었다. 잉글랜드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 왕실의 상징인 스콘석(stone of Scone)을 가져가 사실상 스코틀랜드를 병합시켰다.

 

▲ 스털링 다리의 전투 그림 /위키피디아

 

이제부터 스코틀랜드 민중의 영웅 월레스가 등장할 차례다. 그는 아내를 욕보인 잉글랜드 치안대장을 살해한 이후 산발적인 저항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드디어 그에게 민중적 에너지를 모아 잉글랜드에 대한 저항운동을 벌일 기회가 만들어졌다.

월리스와 40인의 동료는 게릴라식 매복작전을 성공하며 에버딘, 퍼스, 글래스고우, 스콘, 던디, 그리고 북부지방을 차례로 해방시켰다.

1397년 8월 월리스는 스털링(Stirling)에서 앤드루 모레이(Andrew Moray)와 연합했다. 결정적인 승리는 그해 9월 11일 스털링 다리 전투(Battle of Stirling Bridge)였다.

스코틀랜드 독립세력은 기사 300명에 불과했고, 5천~6천명이 농민군이었다. 이에 비해 잉글랜드 군은 기사 2천명에 7천명의 정규 보병으로 구성되었다. 양적으로, 질적으로 잉글랜드 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잉글랜드군은 스털링의 포스강에 놓여 있는 다리를 서둘러 건넜다. 병력의 절반 정도가 다리를 지날 무렵, 스코틀랜드 민병대가 다리를 급습했다. 다리가 기사 두명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아 잉글랜드의 기병들이 한꺼번에 지나갈수 없었다. 결국 다리를 사이에 두고 둘로 갈라졌다. 둘로 갈라딘 잉글랜드 병사들을 스코틀랜드 농민군이 각개 격파했다. 지휘관은 살해되어 가죽이 벗겨졌다. 마침내 다리가 무너지면서 다수의 잉글랜드 군이 물에 빠졌다. 물에 빠진 기사들은 무거운 갑옷의 무게 때문에 익사하거나 간신히 물가로 나와도 살해되었다. 잉글랜드 군은 100명의 기사가 죽고 5천명의 보병을 잃었다.

스털링 다리 전투에서 대승을 걷은 후 월리스는 영주들로부터 ‘스코틀랜드의 보호자’(Guardian of Scotland)라는 지위를 얻었다. 이로써 월리스는 스코틀랜드 군과 민병대의 지휘자로서, 런던탑에 갇힌 베일리얼 국왕의 대리통치자 또는 섭정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 웨스트민스터에서 재판을 받는 월리스 /위키피디아

 

하지만 그의 위세도 오래가지 못했다.

이듬해 1298년 4월 1일 폴커크 전투(Battle of Falkirk)에서 잉글랜드 군에 참패했다. 이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은 많은 수를 잃었고, 월리스는 겨우 탈출에 성공했지만 그의 명성은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영주들은 월리스에게서 ‘스코틀랜드의 수호자’ 칭호를 박탈하고 잉글랜드 에드워드 1세와 협상을 시도했다.

월리스는 이때부터 도망을 다닌다. 한때 프랑스로 건너가 필리프 4세의 지원을 요청하기도 하고, 스코틀랜드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로마를 다녀오기도 했다.

7년 동안 그는 숨어 지냈다. 그러던중 1305년 8월 5일 글래스고우 근방에서 잉글랜드에 부역하고 있던 스코틀랜드 기사에게 체포되어 잉글랜드 군에 넘겨졌다. 그는 런던으로 이송되어 웨스트민스터에 갇혔다.

잉글랜드는 그에게 반역죄의 죄명을 쒸웠다. 하지만 월레스는 “나는 한번도 에드워드에게 복종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반역할 수조차 없다”고 항의했다. 그에게 왕은 런던탑에 갇힌 스코틀랜드 국왕 베일리얼이었다.

1305년 8월 23일 월리스는 벌거벗겨진 채 런던 거리에 끌려 다니다가 마침내 사형당했다.

그의 애국적인 독립 투쟁은 스코틀랜드의 민중에게 민요로, 전설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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