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1 오늘] 소련군 탱크에 짓밟힌 ‘프라하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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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1 오늘] 소련군 탱크에 짓밟힌 ‘프라하의 봄’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8.20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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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브체크 당서기 주도로 일어난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1968년 8월 21일,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가 소련군과 바르샤바 조약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전날 밤에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에 집결한 병력수는 25만명. 소련군이 주축이 되고, 폴란드, 불가리아, 헝가리, 동독군 등 위성국 4개국 병력이 동원되었다. 루마니아와 알바니아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자유화를 지지하며 불참의사를 밝혔다.

2,000대의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바르샤바 조약 군대는 순식간에 프라하를 장악했다.

알렉산드르 두브체크(lexander Dubček)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제1서기는 인민들에게 소련군에 저항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울분에 찬 프라하 청년들은 국기를 흔들며 소련군 탱크에 돌진했다. 일부 소련제 탱크가 불타기도 했지만, 평화시위는 무참히 진압되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당시 죽은 체코슬로바키아 시민이 137명, 중상자가 5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피로 얼룩진 자유화 운동이었다. 역사에서 이를 ‘프라하의 봄’(Prague Spring)이라고 한다.

 

▲ 1968년 8월 프라하에 진입한 소련군 탱크가 불타고 있는 가운데 체코슬로바키아 청년들이 국기를 흔들며 시위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프라하의 봄’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Socialism with a human face)를 표방했다. 이오시프 스탈린 체제 하의 공산주의는 국민들의 민주와 자유화 열망을 빼앗았고, 인민들을 강제노동수용소로 몰아 넣었다. 칼 마르크스는 인민이 평등하고 자유롭게 사는 공산주의, 사회주의 모습을 그렸다. 하지만 지구상에 실현된 공산주의는 감옥 그 자체였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운동은 요컨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배치되는 사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주의에 민주주의적 요소를 가미하자는 이 운동은 서유럽 공산주의자와 이미 공산화된 동유럽 지식인층에 빠르게 번져 나갔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자유화 운동은 지식인들로부터 시작되었다. 1967년 체코슬로바키아 작가동맹은 조심스럽게 공산주의 개혁을 주장했다.

1968년 1월 5일 개혁파 알렉산드르 두브체크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제1서기에 오르면서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아래에서의 민주화 요구와 위에서의 개혁이 폭발적 동력을 낼 필요충분 조건이 형성된 것이다.

▲ 알렉산드르 두브체크 /위키피디아

드디어 프라하에 봄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해 2월 두브체크는 공산주의 변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체코슬로바키아 역사의 민주주의 전통에 부합하는 공산주의를 건설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곧이어 4월 두브체크는 경제적으로 소비재 생산을 강조하고, 다당제의 가능성을 열어두면서 언론의 자유, 이동의 자유를 증진하는 내용을 발표했다. 그는 비밀 경찰의 권력을 제한하고, 체코와 슬로바키아를 동등한 연방으로 분리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외교적으로는 서방국가와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소련 및 공산국가들과 협력하는 방안도 내놨다.

두브체크는 체코슬로바키아 개혁파 공산당원들이 주장한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받아들였다. 이는 인민들에게 민주적, 자유주의적 기반을 확대하고, 소련식 공산주의를 탈피하는 것을 말한다. 두부체크는 또 공산주의식 계획경제에 시장경제 요소를 혼합하는 방식으로 경제난을 해결하려 시도했다.

6월 체코슬로바키아 지식인 70명은 ‘2,000 단어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서는 유명 작가 바출리크(L. Vaculík) 등의 주도로 작성되었는데, 공산주의 체제의 문제점을 거론하며 사회의 개혁을 요구하며 두브체크 정권에 힘을 실어주었다.

 

하지만 소련 공산당 지도부는 두브체크의 자유화 정책에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웃 헝가리 공산당 개혁파들이 두브체크를 동조하고, 프라하의 봄바람은 점차 동유럽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였다. 소련 공산당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서기장은 두브체크의 개혁이 동유럽을 흔들어 소련의 지위를 약화시킬 것을 두려워했다. 소련 공산당 지도부는 프라하의 움직임이 반동운동으로 규정하기 시작했다.

6월 소련 지도부는 체코슬로바키아 지도부에게 압력을 넣어 프라하의 변화를 중지하거나 약화시키려 했다. 하지만 두브체크를 지지하는 열성파 개혁주의자들이 타협을 거부했다.

소련은 군사적 대응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싹이 더 커지기 전에 잘라야 한다는 생각으로, 체코슬로바키아 자유화 운동을 반대하는 동맹군을 편성한다. 그리고 속전속결로 프라하로 진입했다.

소련은 곧바로 두브체크를 해임하고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중앙위원회를 해체시켰다. 소련은 곧바로 구스타프 후사크(Gustáv Husák)를 권력자로 내세워 두브체크가 추진했던 모든 자유화조치를 무효화했다.

 

‘픟라하의 봄’은 그해 여름에 좌절되었다.

하지만 21년후인 1989년 11월에 체코슬로바키아에 벨벳혁명(Velvet Revolution)이 일어나 자유민주 정부가 탄생하고, 실각한 두부체크는 복권돼 연방 의회 의장으로 복귀했다. 두브체크는 1992년 11월 7일 교통사고로 숨졌다.

체코슬로바키아는 1993년 1월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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