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화여학교 6인의 소녀들, 98년만에 독립운동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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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화여학교 6인의 소녀들, 98년만에 독립운동 인정
  • 김현민
  • 승인 2018.08.13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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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주년 광복절 독립유공자 177명 포상…여성,무명 의병 등 발굴·포상

 

국가보훈처는 15일 제73주년 광복절을 맞아 일제의 감시 속에서 과감하게 3·1운동을 재현한 배화여학교 6인의 소녀들과 무장 독립운동을 지원한 석주 이상룡(李相龍) 선생의 손부 허은(許銀) 여사 등 177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포상한다고 밝혔다.

이번에 포상되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93명(애국장 31, 애족장 62) 건국포장 26명 대통령표창 58명으로, 포상자 중 생존 애국지사는 없으며 여성은 26명이다.

훈·포장과 대통령표창은 제73주년 광복절 중앙기념식장과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기념식장에서 유족에게 수여된다.

이 가운데에는 독립유공자 포상 심사기준을 개선함으로써 포상된 분들과 ‘여성 독립운동가 발굴’ 전문가 용역 등 정부의 주도적인 노력으로 포상된 분들이 다수 포함되었다.

 

우선 포상 심사기준 개선으로 177명 가운데 65명(36.7%)을 포상했다. 그동안 3개월로 되어 있던 최소 수형·옥고기준을 폐지해 3개월 이하라도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경우 이번에 포상했다. 또 독립운동 참여로 인해 퇴학을 당한 경우 학생신분을 감안해 포상했고, 실형을 받지 않았더라도 적극적인 독립운동 활동 내용이 분명하면 포상을 전향적으로 고려했다.

또 여성 독립운동가 발굴을 확대하기 위해 전문가 연구용역을 실시해 202명의 여성 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추가 조사와 검증을 거쳐 26명을 포상했다.

 

이로써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분은 1949년 포상이 시작된 이래 건국훈장 1만912명, 건국포장 1,253명, 대통령표창 2,887명 등 총 1만5,052명(여성 325명)에 이른다.

국가보훈처는 앞으로도 독립기념관, 국사편찬위원회, 국가기록원, 지방자치단체, 문화원 등 관련기관과 사료수집 협업 체제를 더욱 강화해 국내외 소장 자료를 지속적으로 수집함으로써 알려지지 않은 여성, 무명의 의병 등 독립유공자 발굴·포상의 사각지대를 해소하는데 더욱 노력해나갈 계획이다.

 

 

제73주년 광복절 포상자 중 주요 인물들의 독립운동 공적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김경화, 박양순, 성혜자, 소은명, 안옥자, 안희경 선생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를 당시의 사진(일제강점기 배화여학교 모습) /국가보훈처

 

① 일제 감시 속에 3·1운동을 재현한 배화여고 6인의 소녀들

3·1운동 1주년을 맞아 교정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6명의 여학생들에게 대통령표창이 추서된다.

1920년 3월 1일 서울 배화여학교 학생들이 일제히 학교 기숙사 뒤편 언덕과 교정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다 수십 명이 일경에 검거되어 재판(경성지방법원, 1920.4.5)에 회부되었다. 이 가운데 김경화(金敬和) 박양순(朴良順) 성혜자(成惠子) 소은명(邵恩明) 안옥자(安玉子) 안희경(安喜敬) 등 공적과 옥고가 확인된 6명이 포상의 영예를 안았다.

학생들은 치밀한 사전 준비를 거쳐 당일 등교하자마자 학교 기숙사 뒷산과 교정에서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침으로써 1년 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재현하였다. 포상자 6명은 거의 10대 후반의 어린 여학생들로서, 최연소자인 소은명 선생의 경우 16세에 불과하였다. 3·1운동 1주년을 맞아 일제가 만세시위 재연을 우려하여 서울시내 곳곳에서 철통같은 경계태세를 유지하는 가운데, 어린 여학생들에 의해 과감하게 결행된 만세시위라는 점이 주목된다.

 

② 서간도 무장 독립운동 지원한 ‘독립군의 어머니’ 허은 여사

만주에서 독립군의 항일투쟁 지원에 헌신한 허은(許銀) 여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여사는 재종조부 되는 왕산 허위(許蔿) 선생(’62, 대한민국장)이 순국(1908)한 뒤, 줄곧 일본경찰의 감시를 받던 중 만 6세가 되던 1915년에 일가족과 함께 서간도로 망명했다. 이후 부민단(扶民團) 등 현지의 독립운동 단체가 주관하는 국치기념일(8.29)과 개천절 행사 등에 참여해 ‘국치가’와 애국가를 부르며 민족독립 의식을 키웠고 16세가 되는 1922년 이상룡(李相龍)(’62, 독립장)의 손자인 이병화(李炳華)(’62, 독립장)와 결혼했다.

이후 1932년 귀국할 때까지 시댁 어른들의 독립운동을 보필하면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회의 때마다 독립운동가들의 조석을 조달하고 군정서의 독립군들이 입을 군복을 만들어 보급하는 등 서간도 무장 독립운동 지원에 헌신하였다.

여사의 친정과 시댁 모두 여럿이 서훈된 대표적인 독립운동 명문가로 손꼽힌다. 여사에 대한 포상은 시조부 이상룡 선생이 남긴『석주유고』, 시부 이준형 선생의 「유서」(1942), 여사의 회고록,『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등의 자료에서 활동내용이 확인되어 이루어졌다.

 

③ 서정시로 저항의식을 표출한 김윤식(김영랑) 선생

전남 강진에서 독립만세운동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김윤식(金允植) 선생께 건국포장이 추서된다.

우리에게는 김영랑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선생은 1919년 3월 25일 고향인 강진군 강진면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고 태극기 등을 제작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1930년대 「毒을 차고」, 「가야금」등의 시를 발표하여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의식을 표출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일제의 갖가지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한 김윤식 선생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

 

④ 군자금 모집하다 체포돼 순국한 의병 계석노 선생

평안북도 의주 등지에서 의병으로 활약하다 순국한 계석노(桂錫魯) 선생께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평북 선천군 심천면 출신으로 1908년 10월부터 1909년 3월 사이에 평북 의주 선천 철산군 일대에서 유상돈(劉尙敦)의 부하로 의진에 참여하여 의병항전을 위한 군자금과 군수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교형을 받고 불과 34살의 젊은 나이에 순국했다.

의진의 지휘관인 유상돈 의병장은 2011년에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함께 활동한 이여숭(李汝崇) 차연욱(車連旭) 이정식(李定植) 선생도 이번에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⑤ 법정에서 당당하게 독립만세 이유를 밝힌 곽영선 선생

황해도 신천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곽영선(郭永善) 선생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19년 3월 24일 평양 숭의여학교 재학 중 고향인 황해도 신천군 신천읍에서 만세운동 준비를 위해 태극기를 만들고 3월 27일 신천읍 장날에 동 만세시위에 참가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다 체포되어 징역 8개월을 받고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그녀는 법정(1919.9.11)에서 자신은 “인도정의, 민족자결에 의해 조선인민의 인성으로” 당연히 만세운동에 참여한 것이며 시위참여는 “일본에 반항하는데 있지 않고 자유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당당하게 밝혀 일제 판사를 당혹케 하였다.

선생에 대한 포상은 판결문(1919.9.11) 등에서 만세시위 활동내용이 확인되어 이루어졌다. 1993년 애국장을 받은 곽림대(郭林大) 선생의 딸로, 부녀가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서훈된 흔치 않은 사례이다.

 

⑥ 군자금 모집하다 중형을 받은 독립군 소대장 한성호 선생

평안북도 일대에서 무장 독립군으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중형을 받은 한성호(韓成浩) 선생께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20년 3월 평북 의주에서 조직된 천마산대(天摩山隊)의 소대장으로 동년 4월 평북 구성에서 현지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징역 10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천마산대는 3?1운동 직후 평북 의주의 천마산을 근거지로 최시흥(崔時興)(’62, 독립장) 등 대한제국 군인 출신들을 주축으로 결성된 항일 무장단체로, 화승총과 일경으로부터 노획한 총검으로 무장하고 여러 차례 유격전을 벌여 1920년 이후 남만주의 광복군사령부에 흡수될 때까지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선생에 대한 포상은「가출옥관계서류」(국가기록원),『대판조일신문 한국관계기사집』(독립기념관) 등의 자료에서 천마산대의 활동내용이 확인되어 이루어졌다.

 

⑦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원한 5인의 여성

평안남도 순천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원한 5명의 여성에게 건국훈장이 추서된다.

최복길(崔福吉) 김경신(金敬信) 김화자(金花子) 옥순영(玉淳永) 이관옥(李觀沃) 선생 등은 1919년 음력 10월 평남 순천에서 윤찬복(尹燦福)(1990, 애족장) 등과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부인향촌회(婦人鄕村會)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고 회원들로부터 의무금 등을 징수하는 방법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고 밀사를 통해 상해의 임시정부에 전달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 단체의 주모자로 회계를 맡았던 최복길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회원으로 참여해 독립운동 자금을 출연한 나머지 네 분에겐 대통령표창이 추서된다. 이들에 대한 포상은 국가보훈처가「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육군성, 1921.2.28) 등의 자료에서 공적내용을 확인하여 이루어졌다.

 

⑧ ‘혁명가족’의 안주인, 이은숙 여사

서간도로 망명해 독립운동기지 개척을 조력하고 물심양면으로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지원한 이은숙(李恩淑) 여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여사는 1889년 충남 공주 출신으로 1908년 10월 20일 서울 상동예배당에서 우당 이회영(李會榮)과 혼례를 올렸다. 그 후 1910년 남편 일가족과 함께 중국 길림성 유하현 삼원보로 이주하여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설립 등 독립운동기지 개척사업을 조력했다. 이후 1919년 남편과 함께 다시 중국 북경으로 거처를 옮겨 현지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후원하고 1925년에 귀국하여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했다. 남편 이회영이 1932년 독립운동 거사를 위해 대련행 기선을 타고 만주로 가던 중 일경에 체포되어 옥중 순국한 고통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들 이규창(李圭昌)(’65, 독립장)이 1935년 3월 상해에서 친일파 처단에 성공하고 피신 중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된 뒤 이듬해 4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3년을 받고 복역할 때도 자식의 옥바라지를 하며, 조국독립의 대의를 간직한 채 꿋꿋이 가시밭길을 걸었다.

  

정부포상자 명단(177명)

 

① 건국훈장 애국장 (31명)

▲계석노(桂錫魯) 의병 ▲김덕원(金德元) 의병 ▲김복선(金福善) 의병 ▲김정문(金正文) 의병 ▲김창욱(金昌旭) 의병 ▲박정손(朴正孫) 국내항일 ▲봉순택(奉順澤) 의병 ▲신돌석(申乭石) 의병 ▲염봉선(廉奉善) 의병 ▲원일상(元逸常) 의병 ▲유갑순(柳甲順) 국내항일 ▲윤병운(尹秉運) 학생운동 ▲윤중성(尹仲成) 만주방면 ▲이금옥(李今玉) 의병 ▲이대호(李大好) 의병 ▲이덕경(李德慶) 의병 ▲이봉래(李鳳來) 의병 ▲이여숭(李汝崇) 의병 ▲이인섭(李麟燮) 의병 ▲이정식(李定植) 의병 ▲이종복(李鍾卜) 의병 ▲이창영(李昌英) 의병 ▲이충재(李忠在) 만주방면 ▲정종명(鄭鍾鳴) 국내항일 ▲차연욱(車連旭) 의병 ▲최병국(崔炳國) 국내항일 ▲최영진(崔英鎭) 만주방면 ▲최인선(崔仁先) 만주방면 ▲최학선(崔學先) 의병 ▲편군선(片君善) 의병 ▲한성호(韓成浩) 국내항일

 

② 건국훈장 애족장 (62명)

▲강약수(姜若秀) 국내항일 ▲고병간(高秉幹) 3·1운동 ▲곽선호(郭善浩) 국내항일 ▲곽영선(郭永善) 3·1운동 ▲곽익호(郭益浩) 국내항일 ▲김공찬(金公贊) 의병 ▲김두현(金斗鉉) 국내항일 ▲김병항(金炳恒) 만주방면 ▲김복근(金福根) 학생운동 ▲김복길(金福吉) 의병 ▲김성구(金聖九) 의병 ▲김성권(金成權) 의병 ▲김시범(金時範) 3·1운동 ▲김연건(金然健) 3·1운동 ▲김영조金榮洮) 3·1운동 ▲김창순(金昌淳) 의병 ▲김창준(金暢浚) 국내항일 ▲김창천(金昌天) 만주방면 ▲남정성(南精性) 국내항일 ▲류연술(柳淵述) 국내항일 ▲박기원(朴基源) 국내항일 ▲박대선(朴大先) 의병 ▲박막동(朴莫同) 의병 ▲박명줄(朴明茁) 국내항일 ▲박상숙(朴相淑) 의병 ▲박세현(朴世賢) 3·1운동 ▲박영달(朴英達) 국내항일 ▲박영렬(朴永烈) 의병 ▲박영찬(朴泳燦) 만주방면 ▲박인석(朴仁錫) 3·1운동 ▲박정금 미주방면 ▲방돌이(方乭伊) 의병 ▲백남충(白南忠) 의병 ▲백산봉(白山峰) 중국방면 ▲변응찬(邊應燦) 임시정부 ▲서석근(徐石根) 의병 ▲손공린(孫公璘) 국내항일 ▲손용우(孫龍祐) 학생운동 ▲송성무(宋聖武) 의병 ▲송진근(宋珍根) 국내항일 ▲신태경(申泰敬) 의병 ▲안수갑(安守甲) 국내항일 ▲오성무(吳成武) 국내항일 ▲이미동(李美東) 국내항일 ▲이병선(李炳善) 의병 ▲이은숙(李恩淑) 중국방면 ▲임대수(林大洙) 국내항일 ▲장명진(張明珍) 국내항일 ▲조병주(曺秉周) 의병 ▲조인배(趙仁培) 3·1운동 ▲최노미(崔老味) 의병 ▲최명기(崔明起) 의병 ▲최복길(崔福吉) 국내항일 ▲최영만(崔永萬) 의병 ▲최의붕(崔義鵬) 국내항일 ▲최점손(崔点孫) 의병 ▲하순철(河順哲) 국내항일 ▲한도신(韓道信) 중국방면 ▲함순안(咸順安) 의병 ▲허은(許銀) 만주방면 ▲홍종식(洪鍾寔) 국내항일 ▲황목룡(黃木龍) 의병

 

③ 건국포장 (26명)

▲곽재호(郭載鎬) 의병 ▲김명려(金明麗) 3·1운동 ▲김순종(金順宗) 국내항일 ▲김윤식(金允植) 국내항일 ▲김한용(金漢龍) 국내항일 ▲김한필(金漢弼) 국내항일 ▲명순조(明舜朝) 임시정부 ▲방한조(方漢祚) 미주방면 ▲변기학(卞奇學) 국내항일 ▲성석기(成錫驥) 3·1운동 ▲송병일(宋炳一) 국내항일 ▲송성겸(宋聖謙) 국내항일 ▲송정욱(宋鼎頊) 임시정부 ▲신우균(申祐均) 국내항일 ▲신창희(申昌喜) 중국방면 ▲안종달(安鍾達) 3·1운동 ▲양성호(梁性皓) 일본방면 ▲이갑문(李甲文) 학생운동 ▲이동화(李東華) 국내항일 ▲이병호(李炳浩) 미주방면 ▲이상래(李祥來) 국내항일 ▲이재수(李在洙) 미주방면 ▲제영순(諸英淳) 국내항일 ▲조순석(趙順石) 국내항일 ▲최은동(崔殷東) 의병 ▲한익권(韓益權) 미주방면

 

④ 대통령표창 (58명)

▲강태하(姜太河) 국내항일 ▲고인석(高麟錫) 학생운동 ▲권준희(權準羲) 국내항일 ▲김경신(金敬信) 국내항일 ▲김경화(金敬和) 학생운동 ▲김광순(金光珣) 3·1운동 ▲김금석(金今石) 3·1운동 ▲김성덕(金盛德) 3·1운동 ▲김용덕(金龍德) 국내항일 ▲김종언(金宗彦) 국내항일 ▲김주석(金周錫) 국내항일 ▲김진림(金震林) 의병 ▲김호(金護) 3·1운동 ▲김화자(金花子) 국내항일 ▲나정윤(羅正綸) 국내항일 ▲노보배(盧寶培) 학생운동 ▲노수천(盧守千) 3·1운동 ▲민영진(閔泳軫) 3·1운동 ▲박갑만(朴甲萬) 국내항일 ▲박경선(朴敬善) 미주방면 ▲박덕실(朴德實) 국내항일 ▲박동준(朴東俊) 국내항일 ▲박동희(朴東羲) 3·1운동 ▲박승정(朴承鼎) 3·1운동 ▲박양순(朴良順) 학생운동 ▲변명경(邊明慶) 국내항일 ▲성혜자(成惠子) 학생운동 ▲소은명(邵恩明) 학생운동 ▲손달익(孫達翼) 3·1운동 ▲송영록(宋永錄) 3·1운동 ▲송인수(宋仁洙) 3·1운동 ▲신계선(愼啓善) 3·1운동 ▲안옥자(安玉子) 학생운동 ▲안희경(安喜敬) 학생운동 ▲옥순영(玉淳永) 국내항일 ▲윤동휘(尹東彙) 3·1운동 ▲윤병의(尹秉義) 의병 ▲이강하(李康夏) 의병 ▲이공우(李公雨) 3·1운동 ▲이관옥(李觀沃) 국내항일 ▲이범성(李範成) 3·1운동 ▲이호상(李浩相) 3·1운동 ▲임용한(林容漢) 3·1운동 ▲임창현(林昌鉉) 3·1운동 ▲장재관(張在瓘) 3·1운동 ▲전천년(田千年) 3·1운동 ▲정금자(鄭錦子) 학생운동 ▲정의용(鄭宜鎔) 3·1운동 ▲정인근(鄭仁根) 학생운동 ▲정지영(鄭智永) 미주방면 ▲조공찬(曺公贊) 3·1운동 ▲조만인(趙晩仁) 3·1운동 ▲조무빈(趙武彬) 3·1운동 ▲조진규(趙珍奎) 국내항일 ▲최은전(崔殷田) 학생운동 ▲한백흥(韓伯興) 3·1운동 ▲허경(許璟) 국내항일 ▲홍승애(洪承愛)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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