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8월 12일] 천년 앙금을 남긴 아스칼론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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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8월 12일] 천년 앙금을 남긴 아스칼론 전투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8.11 16: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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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십자군전쟁에 예루살렘 탈환의 마지막 전투…이슬람 세계 자극

 

이스라엘 행정수도 텔라비브 남쪽으로 50km, 가자지구 경계에서 북쪽으로 13km 떨어진 지중해 연안에 아슈켈론(Ashikelon)이란 작은 항구도시가 있다. 고대와 중세엔 이 곳이 예루살렘의 외항으로 아스칼론(Ascalon)이라고 했다.

1099년 8월 12일, 이 곳에서 예루살렘을 정복한 유럽의 십자군과 이를 되찾으려는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 사이에 대회전이 벌어진다. 이를 아스칼론 전투라고 한다.

 

▲ 장 빅토르 슈네츠 작 아스칼론 전투 (프랑스국립박물관 소장) /위키피디아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된 1,000년대 인류는 맹목적인 종교에 매달려 있었다. 유럽엔 기독교, 아랍은 신흥 이슬람이 지배했다.

십자군 전쟁은 종교를 앞세워 이교도에 빼앗긴 성도를 찾는 인류역사상 초유의 국제전이었다. 양대 진영은 신앙심으로 뭉쳤고, 종교적 신앙은 상대에 대한 적개심으로 돌변해 멸종에 가까운 집단살육을 저질렀다.

▲ 아스칼론 위치 /위키피디아

카놋사 굴욕(1077년) 등의 사건을 거치며 세속군주와 싸워 이긴 로마 교황은 우르바노 2세에 이르러 십자군 전쟁을 제창한다. 갈라진 교파를 통합하고 세속군주를 지배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예루살렘은 이슬람국가인 셀주크 투르크가 점령하고 있었다. 그는 1096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이렇게 연설한다.

“기독교를 위해 싸우는 자는 의복에 십자가를 표시하라. …… 가는 곳마다 명성을 떨치고 겁쟁이들의 나라를 정복하라. 선봉에 선 프랑스인의 용병, 그 뒤를 따르는 나라들의 용맹은 단번에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하리라.”

그해 하반기에 부용의 고드프루아, 그의 동생인 볼로뉴의 보두앵, 툴루즈의 레몽, 블루아의 스테판, 타란토의 보에몽 등 주로 프랑스 출신 영주들이 이끄는 군대가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넜다. 십자군은 지중해 연안을 따라 남하, 이슬람의 투르크군을 무찌르고 1099년 6월 예루살렘 성벽에 도달했다. 한달 간에 걸쳐 치열한 공성전이 벌어졌다. 그해 7월 마침내 프랑크 군을 주력으로 하는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입성했다.

그리고 대학살이 벌어졌다. 이슬람은 물론 유태인들도 십자군의 칼에 쓰러졌다. 이교도는 남녀노소 불문이었다. 1주일에 걸친 광란의 학살극은 끝났지만, 살아남은 몇백명의 생존자는 수만구의 시체를 치운 뒤 쓰러졌다. 후에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은 십자군을 “광신에 따른 야만행위”라고 평가했다.

학살은 보복을 초래했다. 무슬림 형제들의 학살에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가 군대를 이끌고 아스칼론 항구로 들어왔다. 병력은 5만명(2만~3만명이라는 설도 있다).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서였다.

프랑스 출신 기사단은 1만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기습 공격에 나섰다.

8월 12일 아침, 십자군은 정찰부대의 보고를 받고 파티마 부대를 향해 진군했다. 이집트 군대는 전열을 정비할 틈도 없이 십자군의 공격을 받았다. 전투는 순식간에 끝났다. 이집트 함대가 불탔고, 함대에서 빠져나온 군인들은 바닷가에 진을 치고 있던 십자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파티마군의 일부는 추격을 피해 나무에 올라 갔지만 화살에 맞아 죽었고, 아스칼론 항구로 도망치던 병사들도 십자군 부대의 공격에 전사했다. 죽은 사람은 군인 1만명, 아스칼론 주민 2,700여명, 도합 1만2,700명이라는 후세 역사가의 기록이 남아있지만, 실제 죽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세어볼 틈도 없었다. 기독교를 앞세운 십자군은 살인적 광기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이 전투는 1차 십자군 전쟁의 마지막 전투로 기록된다. 예루살렘 주변의 이슬람 국가들이 유럽의 기독교 군단에 패해 전투력을 상실했고, 기력을 회복할 때까지 전투가 중단된다. 지금 이스라엘과 레바논의 지중해 연안에 유럽 기사단의 성채가 지어진 것도 이 전투 이후의 일이다.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기간은 88년간이다.

 

 

패배한 이슬람 세계는 예루살렘과 아스칼론에서의 대학살 굴욕을 잊지 않았다. 그들의 마음 속엔 신(알라)의 이름으로 이교도를 물리치자는 의식이 꿈틀거렸고, 다마스커스와 바그다드 사이의 토후(에미레이트)들은 성전(지하드)을 부르짖었다. 쿠르드족 출신의 살라딘은 시라아와 이라크를 병합해 중동을 제패했다. 그는 지중해연안의 십자군 영토를 공격했다. 1187년 10월 2일 살라딘의 군대는 마침내 예루살렘을 탈환했다.

이슬람이 예루살렘을 다시 찾을 때 살라딘은 기독교인들이 자유롭게 도시를 떠나게 두었다. 보복이 새로운 보복을 부르는 것을 알았기에, 그는 이슬람 쪽에서 먼저 보복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1천년전의 대학살극은 유럽인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하지만 이슬람인들에게선 아직도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다. 2015년 파리 테러참사가 발생했을 때 IS 선전매체는 "8명의 형제가 ‘십자군' 프랑스 수도의 여러 곳을 공격했다"며 "프랑스와 이들을 추종하는 자들은 IS의 표적으로 남아있다"고 위협했다. IS가 프랑스를 공격한 명분으로 1천년 전의 십자군 전쟁을 거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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