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강대호 칼럼니스트] 글을 연재하면서 성북구 수유동과 서초구 내곡동이 연결된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가 1학년 때 다녔던 초등학교를 다시 찾아보니 그랬습니다. 제가 다닌 학교는 수유동에 있던 한신대학교 병설 한신국민학교입니다.
제게는 지금도 떠오르는 초등학교 1학년 시절의 장면들이 있습니다. 제 머리에는 머리카락이 나지 않는 검지 두 마디 크기의 흉터가 있는데 등굣길 사고 때문이었습니다. 제 머리를 향해 날아오던 그 물체를 또렷이 기억합니다. 제 짝도 기억납니다. 그 아이의 친구들도요. 당시 수유동 아이들과 여러모로 다르게 보였으니까요.
이 아이들은 외모부터 달랐습니다. 햇빛에 거슬린 듯 피부가 어두웠고 거칠었습니다. 남자아이들은 짧은 머리에 여자아이들은 똑단발을 했습니다. 사립학교라 교복을 입었는데 같은 옷을 입었어도 이 아이들은 튀어 보였습니다.
집도 멀었습니다. 제 짝은 아침 일찍 친구들과 그리고 언니 오빠들과 동네 입구에서 스쿨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려 한강을 건넌 다음에 또 한참을 달려 수유동의 학교까지 온다고 했습니다.
이들이 사는 동네는 (1학년이었던 1973년 봄에는) 성동구 언주출장소 관내의 내곡동이었고, 에틴저 마을 혹은 헌인마을이라 불렸습니다. 내곡동 일대는 그 후 성동구 영동출장소와 강남구 시절을 거쳐 지금은 서초구입니다. 에틴저는 이 마을을 후원한 어느 미국인의 이름입니다.
서울 남쪽 끝자락 내곡동에 사는 아이들이 서울 북쪽 끝자락에 있는 수유동의 학교에 다니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이 아이들이 ‘미감아’인 까닭이었습니다.
미감아라 불린 아이들
미감아(未感兒)는 사전적 의미로 “병 따위에 아직 감염되지 아니한 아이”를 의미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센병 부모에게서 태어났지만, 한센병에 걸리지 않은 아이를 한때 미감아라고 불렀습니다.
예전에 우리나라는 한센병에서 치유된 사람들이 모여 살던 마을이 전국에 있었습니다. ‘음성 나환자촌’이라고도 불렀는데 서울 서초구 내곡동의 헌인마을도 그중 한 곳이었습니다. 한 마을에서 가족을 이루고 살았으니 아이들은 계속 태어나고, 그 아이들이 학령기가 되면 학교에 가는 게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지역사회는 한센병 이력을 가졌던 이들과 그 가족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습니다. 1969년 내곡동에 있던 음성 나환자 정착촌 ‘에틴저 마을’의 학령기 아동 5명은 인근 세곡동의 ‘대왕국민학교’에 입학하려 했으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당시 보건사회부 장관이 발행한 ‘미감아증명서’, 즉 "이 아동은 한센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다"는 증명서를 첨부하여 입학을 허가한다고 했으나 일부 재학생 부모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으며 항의했습니다.
당시 조선일보에 ‘또 미감아(未感児) 울리는 분별없는 등교 거부’라는 기사가 실렸는데 제목에서 보듯 ‘또’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반복되는 일이란 걸 보여줍니다.
한센병 자녀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움직임은 과거부터 있었는데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한센인 자녀 중 감염되지 않은 아이들을 ‘미감아 보육원’에 수용하기도 했습니다. 보육원에 분교를 설치했고요.
헌인마을 아이들이 학교에서 거부당한 1969년에는 용인 구성에 있는 음성 나환자촌인 동진원에 사는 미감아들도 학교에서 거부당하는 등 반복해서 벌어지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에틴저 마을, 즉 헌인마을 아이들은 대왕국민학교에 다니지 못했습니다. 대신 새로 설립한 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마침 미감아와 비미감아를 통합 교육하겠다고 나서는 데가 있었는데 바로 한국신학대학교였습니다. 당시에는 대학교 교정이 수유동에 있었습니다. 지금 그 자리에는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등이 있습니다.
1969년 6월 22일에 한국신학대학 병설 한신국민학교가 개교되었습니다. 1969년에는 미감아 아동들만 교육했으나 1970년부터는 비미감아, 즉 수유동 일대의 미감아 아닌 아동들도 모집했습니다. 덕분에 저는 1973년에 한신국민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고 한강 건너 멀리에 있던 내곡동 에틴저마을에서 온 미감아 짝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한신초등학교는 지금 수유동에 없습니다. 쌍문동으로 이전했습니다. 학교가 있던 자리에는 교회와 빌라가 들어섰고요. 2020년 10월경 저는 쌍문동의 한신초등학교를 방문해 미감아 교육 관련한 자료를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학교 관계자는 1991년에 마지막 미감아가 졸업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20년 넘게 내곡동 ‘에틴저 마을’의 아이들을 통학시킨 스쿨버스 기사가 마지막 한 명 남은 이 아이를 자신의 승용차로 통학시켰다는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가축 농장에서 가구 공장, 그리고 재개발 현장으로
제 짝은 부모님이 닭과 돼지를 키운다고 했습니다. 음성 나환자촌에 관한 연구 문헌을 참조하면,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센인 축산단지가 국가 축산업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고 합니다.
헌인마을의 주업은 양계업이었던 거로 보입니다. 1975년경에 나온 동아일보 기사에서 당시 헌인마을은 닭 25만 마리를 기르는 서울에서 가장 규모가 큰 양계마을이었다고 소개합니다.
세월이 흐르며 양계나 양돈이 주업이었던 헌인마을은 가구를 만드는 공장 지대로 변하게 됩니다. 도시 인근 축산업에 규제가 많아지자 축사를 영세한 가구 공장에 임대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저는 2020년부터 틈날 때마다 에틴저 마을, 즉 헌인마을에 가보곤 했습니다. 그렇게 2023년 초까지 옛 에틴저 마을은 쇠락한 가구단지처럼 보였습니다. 재개발을 추진하는 사무실과 예전엔 축사였을 가구 공장들이 한데 모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에틴저 마을의 역사를 목격해왔을 교회도 기념비와 함께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요.
그러던 2023년 재개발 확정 소식이 들리더니 2024년 5월 말 철거 소식이 들렸습니다. 확정되고 철거하기까지 시간이 걸릴 거로 생각했는데 전격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저는 6월 초에 헌인마을에 가봤습니다. 거의 헐리고 헌인교회 건물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고 사진을 담아왔지만 내가 방문한 얼마 후 교회 마저 싹 헐려버렸습니다. 2024년 10월 초 현재, 기초공사가 한창입니다.
음성 나환자들의 정착촌이었던 헌인마을은 최고급 공동주택단지로 변신할 예정입니다. 그런데, 교회 입구에 있던 ‘에틴저 마을’ 기념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제 취재 수첩에 과제 제목으로 적어두었습니다.
저는 한신국민학교에 1학년만, 그러니까 1년 남짓 다녔습니다. 그래도 당시의 인상적인 기억 덕분에 수유동과 내곡동이 이어지는 이야기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는 사람만 알고 있다가 그렇게 잊힐 수도 있었던 이야기를 이렇게 다시 전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주에도 서울 끝자락 내곡동 일대에 얽힌 이야기를 이어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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