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석원 이코노미스트·SK증권 경영고문] 9월 중순 유력 글로벌 IB 한곳이 발표한 반도체 산업 관련 리포트가 국내 증시를 뒤흔들었다.
해당 리포트는 우리나라 대표 반도체 업체 적정 주가(또는 목표 주가)를 기존 적정 주가 추정치에서 30~50% 가량 하향했다. 그리고 리포트 발표 ‘전후’부터 해당 IB 창구를 비롯한 외국계 증권사 창구에서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반도체 업체 주식이 지속적으로 팔리고 있는데, 이 여파로 해당 기업들의 주가는 10~20% 정도 떨어졌다.
증시의 효율성을 감안하면 실질적인 기업 가치 하락 가능성이 주 원인이겠지만, 상당 부분 해당 리포트의 영향이 반영됐다는 것이 일반적 인식이다.
이에 따라 국내 언론에서는 외국계 IB의 이번 리포트가 이처럼 큰 영향을 준 이유, 과거 사례를 포함해 반복적으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 등을 다각도로 취재하고 분석한 기사를 내고 있다. 과거에도 비슷한 사례가 많았고, 그 때마다 논란이 있어왔기 때문이다. 2020년 이후만 보더라도 국내 주요 배터리 업체나 게임·인터넷 업체, 바이오 업체들 역시 과거 외국계 IB의 매도 리포트 발표 이후 큰 폭의 주가 하락을 경험한 바 있다.
반복되는 외국계 리포트發 매도 사태
또한 종목을 떠나 증시 전체에 대한 의견 역시 비슷한 영향을 미친 경우가 있다. 해당 리포트의 발표를 ‘전후’해서 외국인 투자자들의 매도가 집중되다 보니, 외국인 투자 비중이 높은 우리 증시와 종목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일부 국내 개인투자자들이 외국계 IB 리포트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른바 매도 후 리포트를 발표하는 ‘선행 매매’가 이뤄지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섣부른 의심을 갖기보다 먼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도대체 외국계 IB의 리포트가 우리 증시에서 지금처럼 큰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왜일까?
많은 기사들에서도 지적하고 있듯이 대표적으로 외국계 IB와 국내 증권사의 매도 리포트 비율 차이가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실제로 국내에 진출해 있는 주요 외국계 IB의 매도 의견 비중은 전체 리포트의 20%에 육박하는 반면 국내 증권사들의 매도 리포트 비율은 지난 1년간 0.1% 수준에 불과한데, 이러한 상황에서 매도 의견의 영향이 커졌다는 얘기다. 실제로 국내 증권사의 의미 있는 매도 리포트를 발견할 수 없으니 영향을 비교 분석하기조차 어렵다.
다른 이유도 제시된다. 대형 외국인 투자기관들이 자신들을 고객으로 삼고 있는 외국계 IB의 리포트에 더 자주 노출되고, 그러다 보니 해당 리포트의 영향력이 더 클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주로 개인보다는 기관투자자이고, 자신들이 이용하는 창구 증권사 애널리스트의 의견을 참고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이 역시 합리적인 지적이다.
게다가 이러한 지적은 매수 리포트 일변도의 리포트 발표 문화(?)나 애널리스트 리포트 자체의 ‘질적 수준 차이’가 국내 리서치 애널리스트에 대한 투자자들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는 측면에서도 의미 있다. 기업을 둘러싼 주변 환경과 기업 자체의 경쟁력에 의미 있는 변화가 생길 때는 가만히 있다가, 그 변화를 반영해 주가가 이미 떨어진 이후에야, ‘지금은 너무 떨어졌고, 떨어진 주가에서는 살만 하다’라는 관점의 매수 리포트를 반복해서 작성하는 애널리스트에 대해 투자자들이 신뢰를 보낼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또한 대규모의 자금을 운영하는 외국계 기관투자자들의 꾸준한 선별 과정이 외국계 IB 애널리스트 리포트의 평균적인 질적 수준(비록 직전 리포트에서 제시했던 목표 주가를 한번에 40~50% 떨어뜨려 발표하는 애널리스트를 질적으로 우수한 애널리스트라 보긴 애매하지만)을 높여 왔을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따라서 일부 외국계 IB 리포트의 막대한 영향력이 줄어들려면 국내 증권사 역시 매도 리포트의 비중을 더 늘리고, 더 질적으로 우수한 리포트를 작성해 신뢰도를 높일 필요가 있다. 애널리스트 스스로 다른 여러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순수하게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문화, 다른 무엇보다 질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 노력해 양질의 리포트를 제시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문화가 조성되면 외국계 리포트의 매도 의견이 개별 종목의 주가나 증시 전체를 필요 이상으로 출렁거리게 만드는 현상도 완화될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10년 가까이 국내 증권사에서 리서치센터장을 지낸 필자 입장에서는 개별 애널리스트의 노력 만큼이나 중요한 ‘환경’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애널리스트들이 매도 리포트 작성을 주저하고, 양질의 리포트가 나오지 못하게 하는 환경적 요인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환경의 핵심에는 어떤 이유에서든 기관투자자 대상 영업의 수단 중 하나일 뿐으로 애널리스트의 위치를 내려 앉힌, 즉 리서치 리포트의 독립성을 겉으로만 보장한 국내 증권사의 의사 결정이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많은 증권사들이 자기자본을 이용한 위험자산 투자에 치중하면서, 증권사가 고객에게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서비스 중의 하나인 의사결정 조언 업무에 소홀해지면서 이러한 현상이 더욱 가속화되었다고 판단된다.
본업 소홀한 채 기관 영업에 내몰리는 애널리스트
언론에서도 일부 다루고 있지만, 일단 국내 애널리스트들은 업무 대부분의 시간을 기관투자자에 대한 영업 활동에 투입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영업활동은 애널리스트 자발적이든 영업 쪽에서의 요청이든 대부분 숙제나 자료 제공, 대면 발표, NDR(Non deal roadshow: 실질적 거래와 무관하게 기업 측에서 기관투자자를 방문해 회사 상황 등을 설명하고 질의 응답을 하는 영업 활동)나 Corporate Day(특정한 주제로 여러 기업들을 모아 한 장소에서 IR을 진행하게 하고 기관투자자들을 초청하는 영업활동)의 유치, 나아가 다양한 매체를 통한 정보 제공으로 이뤄진다.
왜 이토록 많은 시간을 해당 활동에 투입할까? 이러한 영업 지원 활동이 기관투자자들의 거래 증권사 평가에 반영되고, 법인영업 입장에서는 거래 증권사로 선정되어 매매 주문을 받는 것이 수익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증권사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 계약직인 애널리스트의 연봉과 인센티브는 법인영업 수익과 밀접하게 연동된다. 애널리스트로서는 높은 연봉을 받기 위해 법인영업의 요청이나 기관투자자의 요청을 거절하기 힘든 구조인 것이다. 양질의 리포트를 쓰면 좋지만, 다른 서비스를 해서 평가를 잘 받으면 그만인 상황에서 다수의 리포트 수준은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기관투자자에 대한 각종 서비스를 집중하게 만드는 또 다른 제도도 있다. 일부 언론사에서 실시하는 애널리스트 평가다. 주로 기관투자자들의 투표로 선정되는 애널리스트 평가에서 우수한 점수는 자신의 보수를 올릴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에 애널리스트들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기관투자자 대상 서비스를 제공하려 한다. 투표권을 쥔 기관투자자들이 양질의 리포트라는 측면 이외에 다양한 서비스, 즉 데이터나 분석 모델의 제공, 자신들에 대한 NDR 서비스, 기타 다른 서비스까지 포함해 애널리스트들을 평가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애널리스트로서는 자기 시간의 상당 부분을 리포트 작성 이외의 다른 쪽에 할애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러다 보니 애널리스트 자료 작성의 상당 부분은 RA(Research Assistant: 애널리스트의 다양한 업무를 보조하며 향후 애널리스트로 성장하려는 신입 직원)의 데이터 정리 등에 의존하게 된다.
더 중요한 요인으로 증권사와 기업의 관계가 있다. 구조적으로 주식·채권 등의 발행시장 업무를 담당하는 증권사는 기업들을 고객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기업의 ‘심기’를 거스르기 힘들다. 경쟁이 치열한 발행시장에서 기업은 자신들을 높게 평가해 주고, 따라서 높은 가격에 주식·채권을 발행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증권사를 선택할 유인을 갖기 때문이다. 결국 특정 기업에 대해 매도 리포트를 쓰면 발행시장 영업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아지는데, 이러한 점은 애널리스트의 매도 의견 제시를 어렵게 만든다.
애널리스트와 기업 간의 관계에서도 문제가 있다. 애널리스트는 역할 상 공시 이외에 기업 IR 담당 부서로부터 다양한 정보를 일반투자자들보다 앞서서 제공받는 위치인데, 기업(특히 대기업일수록 더 그렇다) 입장에서 보면 매도 의견을 제시한 애널리스트와 매수 의견을 제시한 애널리스트에 대해 차별적으로 대할 유인이 생긴다.
게다가 NDR 유치를 중요한 영업 지원 실적으로 평가하는 증권사 시스템 하에서는 이 문제가 더 두드러진다. IR 활동이 어려운 중소기업과 달리 대기업의 경우에는 한 기업에 15~20명의 애널리스트가 경합을 하듯 NDR 유치에 힘을 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 기업 입장에서 보면 매도 리포트를 제시한 애널리스트의 NDR 요청을 받아들일 유인이 없다.
실력있는 애널리스트를 키울 토양 안된다
애널리스트의 조기 노화 현상도 문제다. 어떤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애널리스트의 보수가 기관투자자 대상 영업 실적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상황이라면 영업 지원 활동에 대한 비용은 지속적으로 축소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특히 주식 법인영업의 시장 전체 수익이 위축된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이러다 보니 증권사 영업부서는 경험을 통해 양질의 리포트를 작성하는 인력보다, 다양한 루트를 통해 기관투자자에게 서비스하는 비용이 덜 드는 젊은 신입 인력을 선호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되니 당연히 젊은 애널리스트들의 꿈에서 경험 있는 애널리스트로의 성장이라는 꿈은 줄고 애널리스트 경력을 이용한 이직의 욕구는 늘어난다. 좋은 애널리스트들이 나이 들어서까지 일을 하는 경우가 드물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당연히 증권업 전체적으로 보면 과거에 비해 애널리스트를 지원하는 우수한 지망자의 수도 줄어든다. 외부적으로는 기관투자자에 대한 ‘을’의 위치, 내부적으로는 영업에 대한 ‘을’의 위치, 나아가 과거와 달리 평균적인 기대 소득이 낮아진 애널리스트보다, 기대소득이 더 높은 직종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들이 합쳐져 결국 소신 있는 매도 리포트의 부재, 양질의 리포트 부재, 즉 국내 증권사 애널리스트에 대한 신뢰 저하로 이어지고, 반대로 외국계 IB 리포트의 영향력을 키웠다고도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이외에 여러가지 다른 요인들도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증권사 중 상당 수는 은행 또는 대기업 그룹 계열사인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상황이 해당 증권사 애널리스트를 딜레마에 빠뜨리는 경우도 있다. 모기업 또는 관련 계열사들에 대한 매도 의견을 제시해도 될까? 다른 기업에 대해서는 매도 리포트를 쓰고 자신이 속한 증권사와 계열 관계에 있는 기업에 대해서는 매수 의견을 유지하거나 (불편하기 때문에) 의견 자체를 제시하지 않는 것이 애널리스트로서 과연 타당한 행위일까?
물론 필자가 국내 증권사 리서치센터장을 경험했기 때문에 다소 극단적으로 상황을 보는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장기간 좋은 애널리스트로서 시장에서 인정받는 많은 분들도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논의의 상당 부분은 핑계라고도 볼 수 있다.
결국 애널리스트 스스로, 나아가 증권사의 리서치센터 자체가 스스로 독립성을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독립적으로 의견을 제시하더라도 그 의견의 타당성·논리적 정합성 등이 인정받는 것, 한마디로 기관투자자들과 기업, 나아가 내부의 영업과 관련된 요청과 무관하게 자유롭게 의견을 제시해도 당당하게 자신의 위치를 찾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문제 해결 방안일 것이다. 투자자들을 위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애널리스트 정신’을 ‘스스로’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외국계 IB 리포트, 특히 매도 리포트의 영향, 그와 관련해 제기되는 국내 증권사 리포트의 신뢰성 문제를 바라보고 있으면, 우리는 이러한 정신이 인정받고 대우받는 문화를 만드는데 아직 성공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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