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7월 31일] 군대해산…“군대 없으면 나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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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7월 31일] 군대해산…“군대 없으면 나라도 없다”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7.30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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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산 조치에 대한제국군 일제히 거병…일본군 기관총에 참패

 

“짐(朕)이 생각하건대 국사가 다난한 때를 만났으므로 쓸데없는 비용을 극히 절약해서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일에 응용함이 오늘의 급선무이다. …… 짐은 이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황실을 호위하는 데에 필요한 사람들을 뽑아두고 그밖에는 일시 해산시킨다.”

1907년 7월 나약하기 짝이 없는 순종은 아버지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로 조선의 마지막 임금 자리에 올랐다. 7월 20일 헤이그특사사건으로 고종황제가 퇴위하고, 7월 24일 이완용, 송병준 등 7명의 대신들은 일제가 내민 정미7조약(신협약)에 서명한다. 여기에는 군대해산 조치가 포함되어 있었다.

허울뿐인 대한제국 황제가 된지 며칠도 되지 않은 7월 31일 밤 10시쯤, 순종은 “쓸데없는 비용을 절약해 국민복지를 늘린다”는 말도 되지 않는 이유를 내세워 군대 해산의 칙서를 내렸다. 군대가 쓸데 없는 비용만 낭비하는 조직인가. 군대를 해산하면 국민복지가 늘어나는가. 군대가 없는 나라는 국권을 잃는다. 순종은 이 조치를 내리고 3년 후에 조선을 일본에게 들어바친다. 천하의 불효이자,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조선 최후의 임금으로 낙인 찍힌다. 그 자명한 사실을 알면서도 순종은 일제와 친일 대신들의 압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군대해산령을 내렸다.

 

▲ 일본군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고 있는 대한제국군 모습 /위키피디아

 

문제는 다음날이었다.

8월 1일 군부대신 이병무는 훈련을 한다는 이유를 둘러대고 동대문 부근 훈련원 연병장(한국국립의료원 공원 터)으로 병력 소집령을 내렸다. 주위에는 일본군 헌병이 중무장한채 비무장한 상태의 조선군을 포위하고 있었다.

▲ 박승환 참령 /위키피디아

오전 10시 장교와 병사가 모이자 군부협판 한진창이 황제가 내린 군대해산 조칙을 낭독했다. 그리고 부대별로 견장과 검을 반납하는 행사가 진행됐다. 계급장을 떼는 순간 여기저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 총성이 울렸다. 시위대 1연대 1대대장 박승환 참령(參領)이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권총으로 자살한 것이다. 그는 유서에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니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라고 했다. 박승환의 자살에 분격한 사병들이 무기고를 때려 부수고 총을 꺼내 일본군과 교전했다.

이웃에 있던 2연대 1대대 병사들도 총성이 들리자 무기고를 부수고 총을 들었다. 두 대대 이외에도 인근의 다른 부대원 300여명도 군대해산에 불만을 품고 전투에 참여했다.

일본군과 조선군 사이에 치열한 교전이 벌여졌다. 장소는 남대문에서 서소문 사이. 600년 역사의 한양도성에서 처음 있었던 전투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도 수도인 한양 내에서의 전투는 없었다. 이 전투를 ‘남대문 전투’라 부른다.

 

초반에는 조선군이 기선을 잡았다. 그러나 당시 한양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숭례문에 2문의 기관총을 걸고 서소문 근처에 있는 조선군 시위대병영으로 마구 쏘는 일본군의 화력을 구식무기로 무장한 조선 시위들은 당할 수 없었다. 일본군은 당시 국제적으로 악명이 높았던 최신식 막심(Maxim) 기관총도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공병대까지 동원한 일본군은 조선군 병영에 화약을 폭발시켜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전투는 한나절을 지나지 못하고 끝나버렸다. 희생된 120여구의 시체를 또 다른 시구문인 광희문에 버려두었다. 가족들의 곡성(哭聲)이 몇날며칠 이 일대에 울렸다. 살아남은 군인들이 그 후 의병항쟁에 뛰어들었고 이를 정미의병이라 한다.

지금도 서소문 고가도로 시작하는 서소문로에는(국민은행 앞) 시위병영터(侍衛兵營址) 라는 조그만 표지석이 비오는 날 눈물을 흘리고 있다.

 

▲ 프랑스 언론 르 프티 주르날에 실린 남대문 전투 /위피피디아

 

지방의 조선군들도 거병했다.

서울의 시위대가 일본군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지방에 있는 군인들은 의병을 일으켜 서로 연합하여 대대적인 무장항일전을 벌였다. 이들은 각기 의병에 가담하여 의병의 전력을 강화시켰다.

원주 진위대는 얼마전에 숨진 카자흐스탄 피겨 국가대표 데니스 텐의 외고조 민긍호의 지휘 아래 강원도·충북 일대에 본격적인 의병항쟁을 전개했다. 문경의 이강년 부대, 원주의 이은찬 부대, 영천의 정환직․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영해의 신돌석 부대, 호남의 기삼연․심남일․이석용․전해산․안계홍 부대, 충남의 정주원 부대, 함경도의 홍범도․최덕준 부대가 거병했다.

1907년 11월경에는 전국연합의병의 성격을 갖는 13도창의군이 결성되었다. 서울 수복을 목표로 1908년 1월 양주에 집결한 의병 수는 1만명에 이르렀다. 창의대장 이인영, 군사장 허위, 관동의병대장 민긍호, 교남의병대장 박정신, 황해진동대장 권중희, 관서진동대장 방인관, 관북의병대장 정봉준, 호서의병대장 이강년, 호남의병대장 문태수 등으로 조직되었다.

군사장 허위는 선봉대 300여명을 이끌고 동대문 밖 30까지 진격했지만, 후속부대가 뒤따라 오지 못한데다 압도적인 일본군 화력에 밀려 참패하고, 그후 13도창의군은 해산되었다.

 

조선을 병탄하려는 야욕을 품고 있던 일제는 의병들을 그대로 놓아두지 않았다. 일제는 1909년 2,000여명의 군인들을 동원해서 남한 대토벌작전을 감행했다.. 무수한 민간인들이 의병들과 함께 희생되었다. 기록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1만여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그들이 조선 땅에 행했던 작전 이름은 듣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진다. 삼광작전(三光作戰)이다. 중일전쟁에서도 일본이 썼던 작전이다. 보이는 대로 죽이고 불태우고 약탈해가는 작전이었다. 영국 데일리메일기자는 당시 의병장 류인석의 고향 제천을 취재해 서 ‘조선의 비극’이라는 기사를 썼다. 그는 이렇게 기사를 썼다.

“내가 제천에 이르렀을 때 햇살이 뜨거운 여름이었다. 한달전까지만 해도 번화했던 거리였는데 그것이 지금은 시커먼 잿더미와 타다 남은 것들만이 쌓여 있을 따름이다. 완전한 벽하나, 기둥하나, 된장항아리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이제 제천은 지도위에 싹 지워져버렸다.”

군대해산 후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의병운동은 일제의 기관총 앞에 무참하게 패배했지만, 남은 세력은 만주로 넘어가 독립군으로 전환되었다.

 

▲ 서소문로에 서 있는 시위병영터 표지석 /김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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