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호 칼럼니스트] 흙수저, 아니 흑수저의 반란이다. 넷플릭스의 ‘흑백요리사:요리 계급전쟁(이하, 흑백요리사)’은 맛 하나는 최고라고 평가받는 재야의 고수 ‘흑수저’ 요리사들이 대한민국 최고의 스타 셰프 ‘백수저’들에게 도전장을 내밀며 치열하게 맞붙는 100인의 요리 계급 전쟁이다.
‘흑백요리사’는 9월 17일 넷플릭스에서 공개를 시작한 요리 대결 콘셉트의 예능 프로그램이다. 이름이나 얼굴을 보면 딱 아는 유명 요리사들과 지역의 식당 사장이나 요리 유튜버 같은 무명 요리사들이 맞대결을 펼치며 시청자들에게 몰입감을 주고 있다.
특히 요식업의 대가 백종원과 미슐랭 3스타 셰프인 안성재가 심사위원으로 나섰다. 이들이 요리와 음식을 바라보는 관점 또한 시청자들에게 흥미를 준다. 대중적 식당과 파인 다이닝을 상징하는 두 사람의 구도 또한 흑수저와 백수저의 대결로 보이는 면이 있다.
무엇보다 두 심사위원이 눈을 가리고 맛을 보는 ‘안대 심사’ 장면은 선입견 없이 오직 맛으로 평가하겠다는 ‘흑백요리사’의 취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선입견 없는 '맛 승부'에 화제성 폭발
그래서인지 이 프로그램이 입소문과 함께 화제성이 폭발하는 모양새다. 넷플릭스 TOP 10 웹사이트를 참조하면, 지난 16일부터 22일까지 380만 시청수(시청 시간을 작품의 총 러닝 타임으로 나눈 값)를 기록하고 18개국 TOP 10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게다가 넷플릭스 글로벌 TOP 10 TV 비영어 부문 1위를 달성하기도 했다.
흑백요리사는 무엇이 다를까?
무엇보다 규모가 크다. 1라운드에서는 80명의 흑수저 요리사들이 동시에 요리할 수 있도록 1000평 규모의 주방을 세트로 구현했다. 3라운드에서는 100명의 평가단이 나란히 앉아 단체 미션을 진행하는 팀들의 요리 과정을 지켜보기도 했다.
전체 시리즈 촬영에 동원된 조리도구는 프라이팬과 냄비, 접시 등을 합해 천 개가 넘는다고 한다. 또한 제작진은 촬영마다 300대 넘는 카메라를 동원해 각 요리사의 움직임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있다.
모두 넷플릭스의 투자가 있어 가능한 지점이다. 이러한 규모를 완성 시켜 주는 건 출연진들의 정체다. 특히 백수저 요리사들이 공개되었을 때 시청자들은 인터넷과 SNS에서 실시간으로 놀라움을 표했다.
백수저들의 면면을 보면, 요리 관련 방송 프로그램에 등장해 이름과 얼굴을 알린 여경래, 최현석, 정지선 등 유명 식당의 셰프 20명이 모였다. 어쩌면 심사위원 자리에 앉아도 어색하지 않을 거라는 세간의 평이 있는 이들이다.
80명의 흑수저 요리사들은 모두 나름의 서사를 가졌다. 비빔밥에 대한 사랑으로 이름까지 ‘비빔’으로 개명한 ‘비빔 대왕’, 요리 만화책으로 중식을 독학한 ‘만찢남’, 학생들의 끼니를 책임지는 ‘급식대가’, 기막힌 손맛의 요리주점 사장님 ‘이모카세’ 등 닉네임만 봐도 이들의 요리가 궁금해지는 재야의 고수들이다.
대결 콘셉트라 승부가 갈리지만 감동으로 연결된다. 배달 노동자 출신 중식 셰프인 ‘철가방 요리사’와 중식대가 여경래가 펼친 일대일 대결이 특히 그랬다. 경연에서 승리한 철가방 요리사가 상대를 향해 큰절을 올리자 그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대가의 모습은 SNS에서 회자하는 명장면이 되었다.
제작진이 포착하는 흑수저 요리사들의 요리 과정과 평가의 순간도 감동을 자아낸다. 평범해 보이는 요리사들이 비범한 모습으로 소박한 음식을 만들어 내고는 결국 심사위원의 까다로운 입맛을 사로잡는 과정까지 마치 잘 만든 애니메이션이나 무협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재야의 고수들이 수십 년 갈고닦은 솜씨를 인정받는 순간 시청자 역시 뭉클함을 느끼게도 하고.
이러한 서사 덕분에 ‘흑백요리사’가 전 세계적으로 화제일 것이다. 이를 보여주듯 팬덤이 생겨나는 분위기다. 단순한 ‘흥미’를 넘어서서 ‘팬심’ 혹은 ‘덕질’이 생겨야 몰입도가 높아지고 화제성이 이어질 수 있다. 그런 콘텐츠가 성공한다.
이런 관점에서 ‘흑백요리사’는 성공하고 있는 모양새다. 성장 서사를 가진, 만화나 무협영화에나 나올법한 캐릭터의 출연자들은 시청자들의 ‘픽’을 만들어 냈고 ‘덕질’을 유발하고 있다.
온라인에선 많은 밈이 탄생하기도 했다. 새로운 회차 공개일과 상관없이 ‘흑백요리사’가 꾸준히 화제를 이어가는 비결이기도 할 것이다. 심지어 흑수저 요리사들이 운영하는 전국의 식당을 알려주는 맵이 등장했는데 이들 식당은 예약조차 어려운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방송가 예능 제작 환경 달라질까
‘흑백요리사’를 장르로 구분하면 요리 예능 프로그램이다. 즉 예능이다. 국내 방송사의 예능 제작 예산 규모는 물론 제작 관행과 상관없이 넷플릭스가 투자하고 국내 콘텐츠 회사에 제작을 맡긴 예능 프로그램.
그래서 ‘흑백요리사’ 덕분에 예능을 좋아하는 시청자들의 눈높이가 달라질지도 모른다. 넷플릭스가 한국 드라마에 투자한 후 한국 시청자들의 눈높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살펴보면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의 방송가 예능 트렌드를 보면 대개 다수의 연예인과 셀럽, 즉 예능인들이 단체로 출연해 리얼이라고 주장하며 롤 플레잉(role playing) 상황극을 벌인다.
예를 들면, ‘런닝맨’이나 ‘놀면 뭐하니’처럼 스스로 부캐를 만들거나 상황을 설정해 그들만의 세상을 즐긴다. 끼리끼리 친분을 자랑하며.
혹은 ‘삼시세끼’나 ‘언니네 산지직송’ 같은 리얼을 빙자한 체험 활동을 벌인다. 연예인들이 비연예인의 삶을 체험하며 스스로 장하다 느끼는.
물론 기존 예능 트렌드가 시청자들에게 친근하고 방송사엔 안정적이겠지만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OTT 드라마에 중독된 시청자들이 지상파나 케이블 드라마에 웬만해선 만족하지 않는 걸 보면 예능도 조만간 그리되지 않을 거라고 어느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대중들이 ‘흑백요리사’를 요리와 음식으로 그려낸 영화와 같은 예능이라며 감동할 때 한국 방송사와 예능 제작사들은 위기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대중들은 변덕이 심해서 재미있는 데다 감동까지 주는 새로운 콘텐츠가 나온다면 다시 마음 줄 게 분명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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