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강대호 칼럼니스트] 수유동에 한 냉면집이 있습니다. 우이시장 인근에서 40년가량 영업한 이 냉면집은 최근 두 편의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면서 안 그래도 유명했는데 더 유명해졌습니다.
저는 이 냉면집과 가까운 골목의 집에서 1966년부터 1973년까지 살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고향으로 여기는 수유리를 답사할 때마다 들러서 식사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방송에 소개돼 반갑기도 하고 마침 수유리를 소재로 연재하고 있기도 해서 취재 겸 들러보기로 했지요.
그런데, 저는 방송의 위력을 절감하고야 말았습니다. 평일 오후 1시가 훌쩍 넘었는데도 식당 앞은 줄을 서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점심시간 지나면 편히 식사할 수 있는 식당이었거든요. 대개 방송을 보고 온 이들이었습니다. 이 광경을 구경하는 주민들도 있었고요.
저는 냉면집 터의 과거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관련 기록을 보니, 이 식당 건물은 1984년에 준공했습니다. 옆 점포들이나 뒤편의 연립주택들도 80년대에 지어졌고요. 그 전에 이들 건물이 있는 필지는 양계장이었습니다. 규모가 커서 제 눈에는 공장처럼 보였습니다. 닭 그림이 그려진 아치 형태의 간판이 공장 정문 위에 달려 있던 걸로 기억하고요.
과거 항공사진을 보면 이 필지에는 주변 건물들과 다른 모양에다 크기도 큰 건물 여러 채가 있었습니다. 양계 공장이었을 겁니다. 1980년경부터 공장이 헐리고 그 자리에 연립주택 등이 들어서는 거로 보입니다. 냉면집 건물은 1984년부터 항공사진에 모습을 드러내었고요. 항공사진으로 미루어보면 이 냉면집은 1984년부터 지금의 자리에서 영업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제 기억을 사실로 확인받고자 우이시장 인근을 답사할 때마다 이 동네에서 오래 거주한 듯한 주민을 만나면 물어보곤 했습니다. 하지만 냉면집은 기억해도 양계장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다 지난주에 만났습니다. 우이시장 인근 공원에 마실 나온 어르신 중 한 분이 증언해주셨습니다.
1969년부터 우이시장 인근 골목에서 살았다는 이분은 제가 기억하는 걸 거의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냉면집 자리가 원래 공장 규모의 양계장이었는데 닭 그림에 한문으로 상호가 쓰인 간판이 달려 있었다고요. 그리고 이 동네에는 공장 말고도 크고 작은 양계장이 여럿 있었는데 거의 시각장애인들이 운영했다고도 말씀해주셨습니다.
실명의용촌의 양계장
어르신이 언급한 시각장애인은 한국전쟁 때 눈을 다쳐 시력을 잃은 상이군인들을 말합니다. 정부는 이들 시각장애 상이군인들을 수유동 일대에 정착하게 했습니다. 그때가 1955년경이었고 마을 이름이 ‘실명의용촌’이었습니다.
제가 이 마을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어릴 적 다닌, 하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진 유치원을 찾는 과정에서였습니다. 어느 교회와 함께 있었던 게 기억나서 인근의 오래된 교회들의 홈페이지를 뒤졌습니다. 그러다 어느 두 교회가 시작 지점이 같은 걸 알게 되었습니다. 실명의용촌 주민들이 세웠다가 나중에 갈라진 교회들이었습니다.
그때가 코로나가 한창인 2020년이라 사라진 유치원에 대한 탐문이 어려워서 대신 저는 실명의용촌에 관해 더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1955년 6월경 조선일보에 실린 <우이동에 실명의용촌(失明義勇村)> 기사를 참조하면, 6·25 전쟁에서 시력을 잃은 군인들과 그 가족들을 위해 육군 공병단이 18동의 건물을 우이동 일대에 지었습니다. 지금의 수유동입니다. 그렇게 완성된 실명의용촌에 21세대 81명이 살게 되었습니다.
당시 여러 신문에서 이 사연을 전했습니다. 이들 기사를 종합하면, 정부는 노동력을 잃은 상이군인들을 위해서 생활비도 부담했습니다. 이들의 자립을 위해 각 가구당 닭 50마리와 돼지 5마리도 제공했고요. 아마도 수유동 일대 양계장의 역사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나 봅니다.
입소 당시에 정부와 언론의 주목을 받은 그곳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1956년경 입소 1년을 기념해서 찾아간 기사 몇 편이 있었습니다. 그 후 실명의용촌은 세간의 이목에서 멀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적어도 언론에 실린 기사 빈도를 보면 그런 거 같습니다.
입소 10년이 가까워져 오는 1964년에야 기사 하나를 볼 수 있습니다. 1964년 7월경 조선일보 <상이촌에 생업자금> 기사에서 재향군인회가 실명의용촌에 생업자금을 지원했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실명의용촌 입주 20년이 훌쩍 지나서야 기사 하나가 겨우 나옵니다. 1976년 7월경 매일경제 <조달청장 수유 실명의용촌에 원호성품 전달>이라는 기사에서 조달청 직원들이 모은 성금으로 ‘블록 벽돌 제조 틀’ 20대를 전달했다고 밝힙니다.
실명의용촌이 자리했던 동네는 지금은 흔적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평범한 주택가로 보입니다. 그 동네에서 아주 오래 산 주민들도 대략만 기억했습니다. 양계장 등 농장은 아주 오래전에 사라졌고 그 자리에 주택이 들어서자 다른 사람들이 들어와 섞여 살았다면서요. 당시 실명의용촌 농장에 물을 대었다는 ‘물댐길’이라는 지명만 경로당 간판과 골목 이름으로 남았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1987년 6월경 경향신문에 실린 <"역전의 勇士(용사)는 自活(자활)에도 勇士(용사)">라는 기사에서 이들의 말년을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기사는 전국에 산재한 상이 제대 군인들의 마을, 세칭 의용촌 혹은 용사촌을 방문했는데 수유동 실명의용촌 소식도 언급했거든요.
처음에는 우이천 바로 옆 모래땅이었지만 80년대 중반 당시에는 100여 가구의 일반인들과 잘 어울리며 평온하게 살아가고 있다며 집단 거주촌의 모습이 사라진 평범한 주택가의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그런데 동네 입구에 이승만 전 대통령의 글씨가 새겨진 ‘실명의용부(失明義勇部)’라는 기념비가 있다고 기사는 전하기도 했습니다.
수유동에서 사라진 실명의용촌과 기념비
기념비가 있었다는 기사를 본 후 저는 옛 실명의용촌 일대를 샅샅이 뒤졌습니다. 그 동네에서 오래 거주한 주민들에게 물어보기도 했고요. 기념비는 찾을 수 없었고 사람들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실명의용부 기념비는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의 ‘보훈교육연구원’ 앞마당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곳은 ‘보훈요양원’ 등 각종 보훈 관련 시설이 들어선 세칭 ‘보훈단지’라 불리는 곳입니다. 작은 호수가 있고 나무도 우거져 산책하기 좋은 곳이기도 합니다.
다만 인근의 주택가와는 확연히 구분되어서 분리된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오래전 수유리 주민들도 실명의용촌을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보훈교육연구원 측에 실명의용부 기념비가 언제 그 자리로 옮겨왔는지 문의해 보았지만 정확한 기록은 남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다만 보훈처로부터 업무가 이관된 1999년에도 그 자리에 있었다고 확인해 주었습니다.
1987년까지만 해도 수유리에 있던 기념비가 최소한 1999년부터는 수원에 있는 겁니다. 그사이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요. 이 사실을 알게 된 2020년부터 지금까지 틈날 때마다 관련 자료를 뒤지곤 하는데 더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근대사의 아픔을 간직한 수유리 실명의용촌은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높이 2미터 남짓의 돌로만 흔적으로 남았습니다. 그것도 원래 세워진 곳이 아닌 멀리 떨어진 수원으로 가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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