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강대호 칼럼니스트] 수유리는 제 고향입니다. 부모님과 형제들은 경북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저는 서울 수유리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그런 제가 기억하는 어릴 적 첫 장면은 수유리 집 마당에 핀 장미의 가시에 찔린 순간입니다.
수유리에서 태어나고 자란 저는 오래도록 가족들의 고향인 경북을 제 고향으로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가족들의 뿌리를 제 뿌리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세월 또한 흐르자 경북의 부모님 묘소 인근에 살던 친척들도 모두 세상을 떠났습니다. 명절에 성묘하러 가도 물 한잔 얻어 마실 데가 없게 된 거죠.
그래서 저는 고향의 의미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태어나고 자란 수유리가 오히려 제 고향처럼 그리워졌습니다. 그때가 몇 년 전입니다. 저는 어릴 적 살던 옛집을 찾아보았고 어릴 적 기억을 쫓아 수유리 일대를 돌아다녔습니다. 제 도시탐험의 시작이었고 지금의 저를 있게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수유동, 성북구에서 도봉구 그리고 강북구로
저는 먼저 1966년부터 1973년까지 우리 가족이 살았던 수유리 옛집을 찾고 싶었습니다. 우리 집 앞 골목에는 제 또래 친구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동네로 이사해도 버스를 타고 방문하곤 했습니다. 그러다 차츰 발길을 끊었고요. 그러다 보니 수유동 일대가 크게 변하고 버스가 지나는 경로도 바뀌어 기억으로만 찾아가기는 힘들었습니다.
심지어 옛 주소가 나온 주민등록 서류에는 우리 가족이 살던 집이 ‘성북구 쌍문동’이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혼란이 왔습니다. 분명 가족들이 옛날이야기를 하면 수유리에 살던 시절을 떠올리곤 했거든요. 집 앞을 지나는 시내버스에도 수유리라고 적혀 있었고요.
지금이야 바뀐 지번을 찾아주는 인터넷 서비스가 있다는 걸 알지만 당시에는 그런 서비스가 있는 걸 몰라서 동사무소는 물론 구청까지 방문했습니다. 결론은 수유동이었습니다. 1960년대에 우이천 부근에 택지가 복잡하게 들어서자 지번 부여도 수유동과 쌍문동을 뒤섞는 등 복잡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일대 골목들이 수유동과 쌍문동으로 나뉘었어도 사람들은 그냥 수유리로 알고 있었고요.
결국, 성북구에서 도봉구가 분구한 후 다시 도봉구에서 강북구가 분구되면서 과거 수유리로 불렸던 우이천 남쪽의 쌍문동이 강북구 수유2동이 되었습니다. 우리 가족의 옛집이 있는 골목도요.
수유동 국민주택단지
형제들에게 물어보니 수유리 옛집이 아담했었다고 기억합니다. 그래도 내 기억 속에는 있을 건 모두 갖춘 집이었습니다. 그런 나의 옛집은 마루를 가운데 두고 방이 세 개 있었습니다. 부모님과 내가 안방을, 누나와 할머니가 가운뎃방을, 형이 건넛방을 사용했습니다.
마당으로 나오면 왼쪽 구석에 화장실이, 오른쪽 구석에 장독대와 광이 있었습니다. 마당 가운데에는 장미를 심은 작은 화단이 있었고 장독대 맞은편에 부엌으로 들어가는 좁은 통로가 있었습니다. 부엌 아궁이 옆에는 안방으로 연결되는 작은 문이 있었고요. 싱크대나 가스레인지는 없었고 연탄 아궁이와 석유풍로로 음식을 했습니다.
우리 집은 벽돌 벽 구조에 시멘트 기와를 얹은 양옥의 외관에 내부는 한옥 구조를 섞은 단독주택이었습니다. 이런 양식의 주택을 도시사학자 염복규는 그의 저서 <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에서 ‘집장사’들이 건축한 ‘도시한옥’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도시한옥은 “1930~60년대 도시 지역에 건축된 전통 한옥의 구조와 재료를 개량(단순화)한 중소규모 주택”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대문을 나서면 골목이었습니다. 손수레가 겨우 지날 정도로 좁은 골목에는 우리 집과 비슷한 크기의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습니다. 골목 바깥으로 나가면 신작로라고 부르던 너른 길이 펼쳐졌습니다. 그 길로 좀만 가면 우리 골목과 다른 분위기의 골목들이 나왔고요. 자가용이 지나다닐 정도로 넓은 데다 예쁘게 생긴 집들이 나란히 줄 맞춰 있는 골목이었습니다.
그 동네에 같은 유치원에 다니는 친한 친구가 살았습니다. 친구네 집은 나의 수유리 옛집과 달랐습니다. 생긴 모양도 달랐고 무엇보다 화장실이 집 안에 있었습니다. 그게 부러웠습니다. 우리 집은 화장실이 마당에 있어 밤에는 무서웠거든요. 어머니는 생전에 친구네의 입식 부엌이 부러웠다고 하셨습니다.
친구네 가족이 살던 집은 수유동 국민주택단지 안에 있었습니다. 수유동 일대는 1960년대 초부터 국민주택단지로 개발되었습니다.
국민주택은 국민주택기금의 자금을 지원받아 건설한 85㎡(약 25.7평) 이하의 주택을 말합니다. 지금은 주로 아파트단지로 건설하지만, 아파트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과거에는 단독주택단지로 조성했습니다. 수유동처럼요.
광복 후 서울은 도시화로 팽창하면서 주거지 개발이 시급했습니다. 그 해결책으로 제시된 게 수백여 가구가 입주하는 주거단지 형태의 개발이었는데 대표적인 곳이 1960년 지금의 수유2동에 들어선 국민주택단지였습니다. 당시는 우이동에 속했었습니다.
관련 연구 문헌 등을 참고하면, ‘우이동 국민주택단지’는 ‘총면적 4만6165.6평에 394세대로 구성된 근대화 이후 최대규모의 주택 단지 개발 사업’이었다고 합니다. 이 사업의 성공으로 1963년에 수유동 1, 2차 국민주택단지가 288세대 규모로 건설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다른 지역으로도 확대되었고요.
국민주택단지 개발 사업은 1960년대에 수유동 일대가 서울 외곽의 새로운 주거지로 주목받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나아가 주변 지역의 개발을 촉진하기도 했습니다. 수유동 국민주택단지는 상하수도와 도로망은 물론 시장과 학교 같은 배후 시설이 잘 조성되어 단지 주변에서도 같은 혜택을 누릴 수 있었으니까요. 우리 가족이 살던 수유리 옛집과 골목, 그리고 인근의 골목들처럼요.
옛집은 사라졌지만
수십 년 만에 어릴 적 살던 동네를 찾아가는데 왠지 낯익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릴 적 보았던 시장이 그대로 있고 기억 속 길과 골목이 그대로 있었거든요. 물론 기억보다는 작은 길과 좁은 골목이었지만요.
우리 집이 있는 골목도 그대로였습니다. 그래서 혹시 옛집도 그대로 있을까 기대하며 골목에 들어섰습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이 살았던 수유동 옛집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 자리에 다가구 주택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관련 서류로 확인해보니 1992년에 옛집을 헐고 새로 건축한 거였습니다. 골목의 다른 집들도 모두 다가구 주택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친구네가 살던 골목으로도 가보았습니다. 어릴 때 봤던 집들은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대신 1980년대와 2020년대 사이에 지은 걸로 보이는 단독주택과 다가구주택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다만 내가 기억하는 골목 구획과 주택지 구획은 과거 그대로인 듯합니다.
항공사진으로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이 일대의 변화를 살펴봤습니다. 옛집들이 헐리고 새집들이 들어서는 모습이지만 구획은 그대로입니다. 수유동 주택가를 수십 년 만에 찾아왔어도 왠지 낯설지 않다 느껴진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장미꽃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과거 수유동에는 ‘장미원’이라는 유명한 장미 화원이 있었고 우리 집은 물론 수유동의 많은 주택에서 장미를 심었었습니다. 그 장미들이 대를 이어 피어왔나 봅니다. 오늘날에도 수유동 일대 주택가에서 5월 무렵이면 장미꽃이 만발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제게 장미는 수유리와 옛집을 떠올리게 하는 방아쇠입니다. 다음 글에서도 제 기억을 쫓아 수유리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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