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뉴스=박준호 기자] 연애시절 기자의 숨을 턱턱 막은 질문은 “그래서 뭘 잘못했는데?”였다. 여자친구들은 서운하거나 화나는 일이 있으면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직접 알려주지 않고 항상 저렇게 되물었다.
스스로 잘못을 깨닫기 바라는 일종의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인데, 그때마다 기자는 열심히 머리를 쥐어짜며 대답을 내놨다. 하지만 매번 돌아오는 건 “그게 아니야. 잘 한번 생각해봐”라는 핀잔이었다. 차라리 속시원하게 얘기라도 해주면 좋았을 건만, 그러기에는 그들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나 보다.
이 황당한 선문답은 지금 은행과 금융감독원 사이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이복현 금감원장이 ‘가계빚 줄이는 방법’을 질문으로 은행과 스무고개를 벌이면서다. 반나절만 해도 진이 빠지는 이 짓을 이들은 두 달 넘게 이어오고 있다.
이복현 원장은 급증하는 가계부채를 억누르기 위해 은행들에게 ‘대책을 내놓으라’고 압박한다. 은행들은 그 애매하지만 서슬퍼런 주문에 고심을 거듭하며 억제책을 내놓는다. 이복현 원장은 “그 방향이 아니다”라고 퇴짜를 놓는다. 다시 은행은 대책을 발표하고 이 원장은 “그게 아니라니까”를 반복한다. 자기 입으로 얘기할 수 없으니 은행이 알아서 대답을 내놓으라는 식이다.
시작은 지난 7월 2일이었다. 이복현 원장은 금감원 내부 회의에서 “성급한 금리 인하 기대와 국지적 주택가격 반등에 편승한 무리한 대출 확대는 가계부채 문제를 악화시킬 우려가 있다”고 첫 메시지를 냈다. 6월 가계대출 잔액이 전달 대비 5조원 넘게 증가한 데 따른 발언이었다.
은행들은 이자를 높여 가계대출 수요를 줄여보기로 했다. 7~8월 동안 22차례에 걸쳐 주담대 금리를 인상한 것이다. 대출 억제를 위해 자체적으로 쓸 수 있는 카드가 많지 않은 데 따른 결정이었다.
그러자 이 원장은 8월 25일 TV에 나와 “은행들이 금리 인상 등 손 쉬운 방법으로 대응하고 있다. 가계대출 금리 상승은 당국이 바란 게 아니다"라고 공개 경고를 날렸다. 그는 “감독당국의 바람은 가계대출 포트폴리오를 미리 체계적으로 관리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라는 모호한 요구를 덧붙였다.
이번에는 은행들이 각자 다른 구체적인 대책을 내놨다. 주담대의 만기를 30년으로 줄이거나 모기지보험 상품 가입을 중단하고, 다주택자와 1주택자의 전세자금 대출을 제한하는 식이었다. 수요를 억누르는 데 이어 대출 문턱까지 높인 것이다.
그러나 이복현 원장은 9월 4일 “은행들이 들쭉날쭉한 대책을 내고 있다”, “구체적인 내용과 관련해 사전에 금감원과 공감대가 없었다”, “일률적인 규제는 안된다”, “실수요자를 보호해야 한다” 등의 얘기들을 늘어놨다.
은행들은 황당하다는 반응이다. 당국의 애매한 언질에 따라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있는데 돌아오는 건 “오답”이라는 지적 뿐이니 말이다. 이쯤되니 은행권은 당국이 차라리 가이드라인을 내놓기를 바라는 눈치다.
물론 이복현 원장 입장도 이해가 안가는 건 아니다. 안그래도 관치금융 논란이 거센 와중에 은행의 독립적 정책결정까지 좌지우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도 저도 틀렸으니 ‘스스로 잘 생각해서 다시 답을 내놓으라’는 식이면 너무 무책임하다.
취임사에서 “금융기관 및 금융소비자와의 원활한 소통과 의견 수렴은 규제 완화와 시장 안정이라는 목표 달성에 매우 중요한 요소”라며 “현장과의 교류로 문제를 조기 감지해 적절히 대응함으로써 피해와 불안 확산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한 그다. 지금으로서는 소통과 의견수렴 대신 윽박과 질타에만 매몰된 모습이다.
희망을 걸어볼 수 있는 건 오는 10일이다. 이날 이 원장은 시중은행장들과 가계대출 간담회를 열고 실수요자 피해 방지를 논의할 예정이다. 이번 만큼은 은행별 대출조건, 한도 등 정책이 달라 혼동하는 소비자를 고려해 지침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은행과의 협의로 가계대출 억제 정책의 교통정리도 이뤄져야 한다. 온 가족이 모이는 추석 전에 정책이 방향을 잡아야 머리를 맞대고 자금 대책을 세울 수 있지 않겠나.
여자친구들의 질문이 반복되면 결국 기자는 이렇게 답했다. “사람 속 터지게 하지 말고 그냥 하고 싶은 말을 해라. 시간을 가치 있게 보내자. 그게 우리에게 훨씬 의미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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