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담금은 늘어만 가고...규제는 갈수록 심해져
홍콩·싱가포르·미국 등에 법인 설립해 '한국 탈출'
[오피니언뉴스=박준호 기자] 국내 가상자산사업자(VASP)들이 줄줄이 영업을 종료하고 있다. 연 수억원에 달하는 VASP 라이센스 유지비와 배상책임보험료, 헛점 투성이인 법제도 탓이다. 가상자산에 부정적인 세간의 인식, 사실상 사행성 산업으로 취급하는 금융당국의 태도도 커다란 장벽이다.
올 연말 VASP 라이센스 갱신 시기가 다가오면서 국내 가상자산사업자들은 더 줄어들 예정이다. "이제 한국에서는 답이 없어졌다"며 해외 금융 선진국으로 탈출할 채비를 마친 업체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 달 말까지 국내 가상자산사업자 36개 업체 중 15곳이 영업을 종료·중단했다. 이용자의 자산을 보호하기 위한 배상책임보험과 준비금을 적립하지 않으면서다.
지난 달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이 시행되면서 업체들은 해킹이나 전산장애 등 사고 책임을 이행하기 위해 보험·공제에 가입하거나 준비금을 적립해야 한다. 보험의 보상 한도나 준비금은 이용자 가상자산 경제적 가치의 5% 이상 또는 5억원(원화마켓 거래소는 30억원) 이상이다.
업계에 따르면 연간 보험료는 5억원의 약 4~12%로 형성돼 있다. 가상자산법 시행으로 1년에 적게는 2000만원, 많게는 6000만원씩 추가 지출되는 셈이다. 대부분 영세 스타트업 수준인 VASP들에게는 적지 않은 금액이다.
이미 VASP 라이센스를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만 연 수억원에 이른다. 한 블록체인 업체 이사와 대표는 “우선 VASP 신고를 위해서는 정보보호관리체계(ISMS) 예비인증부터 받아야 하는데 이 인증 컨설팅의 착수금만 5000만원”이라며 “취득 후 자금세탁방지(AML) 유지 비용과 그 인건비 등을 모두 합치면 라이센스 유지에 연 5~6억원이 든다”고 밝혔다.
안그래도 수익이 많지 않은데 가상자산법 시행으로 각종 규제가 적용되고 추가 부담금까지 생긴 것이다.
쐐기를 박은 건 지난 달 VASP 업체들에게 일제히 내려진 벤처기업 취소처분이다. 업체들은 그간 벤처기업으로 지정돼 법인세·소득세·취득세·재산세 등 일부 감면, 정책자금·신용보증 등 지원을 받아 왔다. 하지만 지난 달 중소벤처기업부는 VASP 업체들에게 벤처기업을 취소하겠다고 통보했다. 여기에는 벤처기업협회에서 선정한 ‘우수벤처기업’도 포함됐다.
취소사유는 ‘블록체인 기반 암호화 자산매매와 중개업’이 벤처기업 업종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중기부가 근거로 든 건 6년 전인 지난 2018년 '벤처기업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 시행령 일부개정령안'이다. 그간 귀띔 한 번 않다가 가상자산법이 시행된 후에야 재검토해 취소 처분을 내린 것이다. 위 개정안으로 가상자산업은 유흥주점업, 사행시설 운영업 등과 동일선상에 놓였다.
해당 법은 "종전에는 벤처기업에 포함하지 않는 업종을 일반 유흥 주점업, 기타 사행시설 관리 및 운영업 등 유흥 또는 사행성 관련 총 5개 업종으로 정하고 있었다"며 "최근 암호화 자산 매매 및 중개업과 관련된 비정상적 투기과열 현상과 유사수신·자금세탁·해킹 등의 불법행위가 나타남에 따라 앞으로는 암호화 자산 매매 및 중개업을 벤처기업에 포함되지 않도록 함으로써, 우리 산업의 구조조정을 원활히 하고 경쟁력을 높이려는 것“이라며 개정을 의결했다.
벤처기업 취소처분을 받은 5개사는 중기부에 취소철회 요청서를 보내고 소명절차를 거쳤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들 중 한 업체 대표는 “국내에서 합법적으로 사업을 영위하기 위해 VASP를 취득했는데 취득 업체들만 죄다 취소됐다"며 "당국의 관리·감독을 피하려 VASP를 안 받은 업체들은 오히려 취소가 안 됐다"고 말했다. 금융당국 정책을 따른 죄가 벤처기업 탈락이라는 역차별로 돌아온 셈이다.
실제 국내에는 VASP를 취득하지 않고 가상자산 관련 사업을 영위하는 업체가 상당수다. VASP 라이센스에서 명시하는 사업의 범위가 ‘가상자산 매도·매수, 교환, 이전, 보관·관리, 중개·알선·대행’ 다섯가지에 불과해 여기 포함되지 않는 사업은 VASP 라이센스를 취득하지 않아도 된다.
위 다섯 업종은 지난 2021년 제도화된 후 3년 넘게 변치 않고 있는데 이 역시 국내 가상자산 업계의 여러 문제 중 하나로 지적된다. 가상자산 트레이딩 사업을 하는 VASP 미취득 업체 관계자는 “애초에 VASP에 트레이딩 카테고리가 없고 규정도 명확하게 안 정해져서 같은 트레이딩이라 해도 어떤 업체는 VASP를 받고 어떤 업체는 안 받는다"며 "차라리 확실히 정해지면 그에 맞춰 라이센스를 준비하겠지만 그렇지도 않은 상황에서 섣불리 준비했다가는 나중에 무용지물이 될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이달에는 폐업을 결정한 VASP들도 가상자산 배상책임보험에 가입하도록 하면서 또 다시 혼선이 빚어졌다. 당국은 영업 종료 후에도 고객 자산이 남아있을테니 일단 보험에 가입할 것을 요구했다고 전해진다. 폐업 VASP들은 보험 가입 대상에 해당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다가 뒤늦게 보험사를 알아보느라 진땀을 뺐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업계에서는 한국에서 거래소 외 가상자산 사업을 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는 말이 나온다. 한 블록체인 업체 대표는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VASP는 라이센스, 즉 면허다. 지금 상황은 의사 면허를 받아 병원을 열었는데 시도 때도 없이 정부에서 '어느 병원 잘 하고 있는지 조사를 나오는 것"이라며 "그 조사에 대비해야 하는 돈이 한두 푼도 아니고 면허 자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유지비가 든다. 이번에는 거기에 추가금도 붙었는데 기존에 받던 혜택은 사라졌다. 무엇보다 조사에 기준도 없다. 이쯤 되면 이제 사업을 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지 않겠나. 그래서 보험 미가입, 즉 VASP 면허를 반납하는 거다“라고 설명했다.
이달 19일 기준 국내에서 VASP 라이센스를 받은 업체는 총 36곳(합병사 제외)으로, 이 중 올해 말까지 총 25개사의 라이센스가 만료된다.
이미 영업을 종료·중단한 15개사 중에서는 단순히 사업 자체를 관둔 곳도 있지만 일부는 한국을 떠나 홍콩, 싱가포르, 마카오, 미국 등 금융 선진국으로 향한다. 규제와 각종 지원책, 사업환경 자체가 우리나라와 현격히 달라서다.
지난해 홍콩에 법인을 설립한 업체 대표는 “기본적으로 우리나라는 포지티브 규제이기 때문에 정부에서 허가한 사업만 할 수 있다. 반대로 싱가포르, 홍콩, 미국은 네거티브 규제다. 하지 말라는 것 빼고는 다 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일단 당국의 판단이 서지 않은 것은 모두 할 수 있게 열어두고 문제가 생기면 그때 법을 제정하고 가이드를 맞추면 된다는 식"이라며 "우리나라는 블록체인 사업을 한다고 하면 정부가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 홍콩은 창업지원기관, 투자청 등이 스스로 나서서 여기저기 소개해주고 각종 지원도 붙여준다. 아예 우리가 현지로 이전해 오길 바라면서 말이다. 업체 입장에서는 안 갈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개인적인 네트워크 때문에 홍콩으로 갔지만 싱가포르에도 한국 코인 발행사가 굉장히 많다. 현재 상장된 김치 코인이 600여개정도 되는데 이 발행사 중 90% 이상이 싱가포르에 법인을 둔 것으로 안다. 이러면 각종 계약·매출·수익에 따른 세금은 당연하고 거기서 쓰는 돈 자체가 어마어마하다"며 "기본적으로 대표자가 183일 동안 현지에 있어야 하는데 사업 잘돼서 눌러 살면 하다 못해 2~3억원을 현지에서 쓸 거다. 단순히 500개사만 갔다고 계산하면 숨만 쉬어도 1000억~1500억원이다. 식사, 렌트 등 체류비만 해도 어마어마하지 않겠나. 이런 게 전부 싱가포르에 도움이 되지 우리나라에 남는 게 뭐가 있겠나“라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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