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성혁명의 백제무왕 1천4백년만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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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성혁명의 백제무왕 1천4백년만에 나타났다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7.18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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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익산 쌍릉 인골, 백제 무왕 가능성 높다”

 

백제 30대 무왕(武王, 600~641)만큼 출생의 비밀이 복잡한 임금도 없다. 역사서들이 그의 출생을 다양하게 기록했기 때문에 어느 것을 믿어야 할지 모른다는 얘기다.

정사로 받아들이는 『삼국사기』는 “무왕의 이름은 장(璋)이니 법왕(法王)의 아들이다. 법왕이 왕위에 오르고 이듬해에 돌아가시자, 아들로서 왕위를 이었다”고 기록했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무왕은 정통 계보를 이은 왕이다.

하지만 중국 남북조시대 북조(北朝)의 역사를 기록한 『북사』(北史)에는 27대 위덕왕(威德王, 재위 554~598)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외국의 기록이므로, 다소 정확도가 떨어질수도 있다.

국내의 또다른 사서인 『삼국유사』는 무왕이 역성혁명(易姓革命)을 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는 “제30대 무왕(武王)의 이름은 장(璋)이다. 그의 어머니는 과부였는데 수도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다가, 그 연못의 용과 정을 통하고 아들을 낳았다. 어려서의 이름은 서동(薯童)이다.”고 했다.

용은 임금에 비유된다. 용이 어느 과부와 정을 통해 아들을 낳고 임금이 되었으니, 온조왕(溫祚王) 이래 백제 왕가를 이어온 부여(夫餘)씨를 멸하고 새로운 왕조가 태어났다는 얘기인가. 적어도 적통은 아니라는 뜻일 게다.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은 무왕의 탄생 설화의 스토리가 갖는 애매함에 대해 “삼국사기에서는 이 분을 법왕의 아들이라고 하였지만, 여기서는 과부의 아들이라고 전하였으니,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고 얼버무렸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무왕에 대한 서술도 상이하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삼국사기에는 무왕은 할아버지 성왕(聖王)을 죽인 신라를 철천지 원수로 여기고 재임 41년동안 신라와 전쟁을 벌이는 임금으로 나온다. 그래서 시호가 무왕(武王)이다.

삼국사기는 무왕이 풍채와 뛰어나고 뜻과 기상이 호방하고 걸출했다고 기록했다. 그는 재위 기간 내내 신라에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갈등 관계에 있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만으로도 602년(재위 3) 신라의 모산성(母山城)을 포위해 공격한 것을 시작으로 636년(재위 37) 독산성(獨山城) 전투까지 10여 차례 이상 군대를 일으켜 신라를 침공했다. 623년(재위 24) 이후에는 거의 매년 신라와 전투를 벌였으며, 627년(재위 28)에는 무왕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신라에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 전북 익산시 서동공원 /익산시

 

하지만 삼국유사에는 무왕이 신라의 선화공주를 꼬여내 결혼하는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무왕은 어렸을 때 마를 캐 생계를 유지해 서동(薯童)이라고 불리웠다. 그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善花)공주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신라의 도읍인 서라벌로 가서 선화공주가 밤마다 남모르게 서동과 어울리고 있다는 노래(서동요)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다. 그 노래 때문에 선화공주가 궁궐에서 쫓겨나 귀양을 가게 되자 서동은 그녀를 데리고 백제로 와서 결혼했으며, 어렸을 때 마를 캐면서 발견해 모아두었던 황금으로 인심을 얻어 백제의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는 재미있고, 아름다운 설화다.

이렇게 엇갈리는 역사 기록 가운데 어느 것이 맞을까. 하지만 굳이 정답을 얻어야 할까. 입증할 자료도 마땅치 않다. 그냥 미스터리로 남겨두기로 하자. 다만 서로 다른 기록 그대로를 우리의 역사로 받아들이면 된다.

가장 정직한 것은 땅 속에 묻혀 있는 타임캡슐이다. 엣날에 묻어두었던 시체와 유물들이 천년 후에 발굴되어 나타났을 때, 그것들이 뒤틀리고 애매한 역사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 조사 전 대왕릉 모습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이 지난 4월 익산 쌍릉(대왕릉)에서 발견된 인골에서 남성 노년층의 신체 특징과 병리학적 소견을 확인했다고 문화재청이 18일 밝혔다. 그동안 쌍릉은 백제 시대 말기의 왕릉급 무덤이며, 규모가 큰 대왕릉을 서동 설화의 주인공인 무왕의 무덤으로 보는 학설이 유력했는데, 이번 인골 분석 결과도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쌍릉의 존재는 󰡔고려사󰡕에서 처음 확인되며, 고려 충숙왕 때(1327년) 도굴되었다는 사건기록도 남아 있다. 당시부터 고조선 준왕이나 백제 무왕의 능이라는 설이 있었다. 1917년 조선총독부는 쌍릉을 단 며칠 만에 발굴하면서 백제 말기의 왕릉이거나 그에 상당한 자의 능묘라는 것은 확인했지만, 1920년 고적조사보고서에 단 13줄의 내용과 2장의 사진, 2장의 도면만 공식기록 전부로 남겨놓았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지난해 8월부터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익산시와 공동으로 쌍릉에 대한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석실 끝부분에서 여태까지 그 존재가 알려진 바 없던 인골 조각이 담긴 나무상자를 발견했다. 100년 전 일제가 발굴하면서 다른 유물들은 유출했지만, 이는 꺼내 가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부여문화재연구소는 이 인골 자료가 무덤의 주인과 연결된다면, 백제 무왕의 능인지를 결정짓는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고고학과 법의인류학, 유전학, 생화학, 암석학, 임산공학, 물리학 등 관련 전문가들을 모두 참여시켜 인골의 성별, 키, 식습관, 질환, 사망시점, 석실 석재의 산지, 목관재의 수종 등을 정밀 분석했다.

102개의 조각으로 남아있던 인골을 분석한 결과, 성별은 남성인 것으로 조사됐다. 팔꿈치 뼈의 각도(위팔뼈 안쪽위관절융기 돌출양상), 목말뼈(발목뼈 중 하나)의 크기, 넙다리뼈 무릎 부위(먼쪽 뼈 부위)의 너비가 남성일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넙다리뼈의 최대 길이를 추정하여 산출한 결과 키는 161㎝에서 최대 170.1㎝로 추정된다. 훨씬 후세대에 속하는 19세기 조선 시대 성인 남성의 평균 키가 161.1㎝인 것을 고려한다면 비교적 큰 키이다. 참고로, <삼국사기>에는 무왕에 관한 묘사로 ‘풍채가 훌륭하고, 뜻이 호방하며, 기상이 걸출하다’라고 되어 있다. 639년에 작성된 <미륵사지 서탑 금제사리봉안기>에는 ‘대왕폐하’로 불린 기록도 있다.

나이는 최소 50대 이상의 60~70대 노년층으로 봐도 큰 무리가 없다. 목의 울대뼈가 있는 갑상연골에 골화(노화로 연골과 인대가 굳어 뼈처럼 바뀌는 현상)가 상당히 진행되었고, 골반뼈 결합면의 표면이 거칠고, 작은 구멍이 많이 관찰되며, 불규칙한 결절이 있다.

남성 노년층에서 발병하는 등과 허리가 굳는 증상(광범위특발성뼈과다증), 다리와 무릎의 통증(정강뼈와 무릎뼈의 척추외골화)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옆구리 아래 골반뼈(엉덩뼈능선)에 숫자 1(∣) 모양으로 골절되었다가 치유된 흔적이 있다. 어긋나지 않아 타격보다는 낙상 등 때문으로 판단된다. 치료기간이 3개월 정도 되므로, 직접적인 사인으로 보기는 어렵다.

가속 질량분석기(AMS, Accelerator Mass Spectrometer)를 이용한 정강뼈의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 보정연대가 서기 620~659년으로 산출되어 인골의 주인은 7세기 초중반의 어느 시점에 사망한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뼈가 심하게 부식되어 유전자 분석은 쉽지 않았다. 추출한 콜라겐의 탄소 안정동위원소 분석으로 벼, 보리, 콩 등의 섭취량이 많았음을 알 수 있었고, 질소 안정동위원소 분석으로는 어패류 등의 단백질 섭취의 가능성도 확인했다.

익산은 질 좋은 화강암의 산지로 유명한데, 석실의 석재는 약 9㎞ 떨어진 함열읍에서 채석한 것으로 추정된다. 수령이 400년 이상으로 알려진 관재(棺材)는 늦어도 7세기 전반 이전에 벌목된 것을 가공한 것이다. 목관은 최고급 건축・가구재인 금송으로 제작했으며, 이번에 발견된 유골함은 잣나무류의 판자로 만들었다.

최신 공학기술이 반영된 이번 연구에서는 뼈의 3차원 입체(이하 3D) 모형화와 3D 프린팅을 통해 여러 분야에서 활용이 가능한 디지털 자료도 구축했다.

부여문화재연구소측은 ▲ 600년에 즉위하여 641년 사망했다는 무왕의 재임 기록으로 보아 10대나 20대에 즉위한 경우 무왕의 사망 나이가 남성 노년층으로 추정되는 쌍릉의 인골 추정 나이와 비슷하며 ▲ 사망 시점이 7세기 초반부터 중반 즈음이라는 인골 분석 결과는 익산을 기반으로 성장하여 같은 시기에 왕권을 확립한 백제 무왕의 무덤이라는 역사적 가능성을 한 걸음 더 보여준다고 추정했다.

 

▲ 익산 쌍릉(대왕릉) 석실 내부와 발견된 목재유골함 /문화재청
▲ 발견당시 목제유골함과 내부 인골 파편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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