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강대호 칼럼니스트] 도시를 답사하다 보면 한 공간에서 여러 시대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영등포 일대를 예로 들면 조선시대 전통 마을의 흔적, 철도역을 중심으로 확장된 시가지의 흔적, 그리고 공업지대와 그 종사자들이 살았던 주거 공간의 흔적 등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영등포 일대의 변화 과정을 살펴보면 일본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미군과 인연 깊은 공간도 영등포 일대에 꽤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이후 미군 군정기를 거친데다 한국전쟁 정전 후에는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했으니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영등포의 미군 시설은 크게 알려지지 않은 거 같습니다. 용산에 규모가 큰 미군기지가 있었고 영등포와 가까운 대방동에도 비교적 최근까지 미군 시설이 있어서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데다 오래전에 없어진 영등포의 미군 시설은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거 같습니다.
문래동 영단주택 인근의 미군 관사
제가 영등포 일대에 미군 부대가 있었던 걸 알게 된 건 황석영 작가의 소설 덕분입니다. 그의 자전적인 소설에는 영등포에 살았던 작가의 어릴 적 기억이 장소적 배경으로 등장하곤 합니다.
특히 ‘모랫말 아이들’에는 어린 시절의 황석영과 그의 친구들이 돌아다녔던 활동 영역 안에, 즉 영등포 일대에 미군 부대나 기지촌 같은 미군 관련 시설이 여러 군데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황석영 작가가 살았던 문래동 영단주택 구역과 가까운 곳에 미군 관사가 있었습니다. 캠프 로버츠(Camp Roberts)가 바로 그곳인데 1949년에 주한미군 군사고문단과 미국 민간 근로자를 위한 가족 주택단지로 지었다고 합니다.
영등포 관련 연구 문헌 등에서 인용한 미군 지도에 캠프 로버츠의 위치가 나옵니다. 영등포역 앞 경인로의 문래동사거리에서 우회전하면 바로 나오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1960년대에는 미 육군 공병대 가족을 위한 관사로 쓰이다 1970년에 폐쇄했다고 합니다. 캠프 로버츠의 정확한 위치는 포털의 지도 서비스에서 ‘문래창작촌’으로 표시된 구역입니다. 1973년 항공사진에서 주택단지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주택단지가 있던 곳은 현재는 철공소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항공사진을 참고하면, 1973년 이후부터 주택단지 구역이 철공소로 되어간 듯 보입니다. 그 주변 구역은 1960년대부터 철공소가 들어섰다고 합니다.
이 항공사진에서 주택단지 북쪽으로는 공장지대가 나옵니다. 건물 지붕에 ‘방림방적’이라는 문구가 또렷이 보입니다. 그 구역은 원래 태창방직 영등포 공장이 있던 곳인데 1963년 방림에서 인수해 이름을 바꿨습니다.
방림방적 공장 자리는 아파트단지가 되었습니다. 2001년에 들어선 문래자이아파트가 바로 그곳입니다.
그러고 보면 몇 주 전 문래동 영단주택을 다룰 때도 나름 자료 조사와 현지답사를 했던 곳입니다. 그때는 왜 미군 시설의 흔적을 알아채지 못했을까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영등포를 다루며 지나쳤던 곳에 미군 관련 시설이 있었단 걸 또 알게 되었습니다.
맥주 공장 안에 미군을 위한 우유 공장이
과거 영등포에 맥주 공장이 있었단 걸 지난 연재에서 다룬 적 있습니다. 오비맥주 공장과 크라운맥주 공장이 영등포역 부근에 있었는데 광복 후 두 시설 모두 적산이 되었다가 한국인 회사가 되었습니다. 오비맥주 공장 터는 ‘영등포공원’이 되었고 크라운맥주 공장 터에는 ‘영등포푸르지오아파트’가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두 공장 시설 일부에는 미군 관련 시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중 크라운맥주 공장 안에는 1952년부터 1985년까지 캠프 베이커(Camp Baker)가 있었습니다.
이 캠프에는 통신대도 주둔했었는데 흥미로운 점은 미군을 위한 우유 공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아이스크림 공장도 있었다는데 제2차세계대전 사료를 보면 남태평양에 주둔한 미군 병사들에게 아이스크림을 공수하는 게 매우 중요한 군사작전이었을 정도로 아이스크림은 미군에게 중요한 보급물자였습니다.
미군 관련 자료를 보면, 미군은 보건이나 위생상 품질이 확인되지 않은 현지 음식 섭취를 권장하지 않는 건 물론 식자재나 등을 본국으로부터 직접 조달하거나 자체 생산하는 걸 원칙으로 한다고 합니다. 카투사로 복무한 이들은 식당 입구에 한국 음식 섭취 시 주의하라는 문구가 있었다고 군 생활을 회고합니다.
그런 미군이니 한국에서 직접 우유를 생산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맥주 공장 터에는 2000년대 초반에 아파트가 들어섰습니다. 같은 부지 안에 있었던 우유 공장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1985년 미군 측은 캠프 베이커를 한국 측에 반환하고 서울공항의 미군 부대 안에 새로 세운 우유 공장으로 이전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문헌 등에 인용된 미군 측 지도를 참고하면, 영등포공원 자리에 있었던 오비맥주 공장 영역이 캠프 블랙(Camp Black)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어떤 시설이었는지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이 공장 구역 안에도 미군 관련 시설이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여러 층위의 역사 흔적을 볼 수 있는 영등포 일대
위에서 언급한 시설 외에도 영등포시장 서쪽 필지에는 유류를 관리하는 미군 부대가 있었고 당산동 인근의 적산 공장 터에는 캠프 스페이스(Camp Space)라는 미군 통신부대가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미 육군 민간지원단 관련 시설도 여럿 있었고요.
영등포 관련 연구 문헌을 참고하면, 이들 미군 부대 주변으로 이른바 ‘기지촌’으로 불린 유흥가가 들어서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들 부대가 철수한 후에 기지촌은 사라졌지만요.
그리고, 미군 관련 시설이 사라진 후에는 그 공간이 아파트 등 주거 공간으로, 혹은 공장지대로 변했습니다.
이러한 변화 과정을 미처 알아채지 못한 지난 취재를 뼈저리게 반성합니다. 도시탐험 연재를 위해 지역을 답사할 때 여러 층위로 쌓인 역사의 흔적을 더욱 세심히 살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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