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4강 크로아티아에 내재한 역사의 굴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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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4강 크로아티아에 내재한 역사의 굴곡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7.08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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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합스부르크, 나치, 유고에 종속…세르비아와 유혈의 대립

 

유럽의 발칸 반도 소국 크로아티아가 대제국 러시아를 꺾고 월드컵 4강에 올랐다.

면적 5만6,594㎢로 대한민국의 절반 크기이고, 인구는 416만명으로 우리나라의 10분의 1 수준, 부산 인구(353만)보다 약간 많다. 가톨릭 87.8%, 동방정교 4.4%인 카톨릭국가다.

축구는 인구와 면적에 비례하는 게 이니다. 이 소국이 면적으로 300배 넓고, 인구로 34배나 많은 러시아를 이겼다.

1991년 독립해 나라를 세운지 27년 밖에 되지 않았다.

크로아티아는 8일 새벽(한국시각) 러시아 소치의 피스트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8강에서 러시아와에 2-2로 비긴 뒤 승부차기에서 4-3으로 승리했다.

앞서 크로아티아는 조별 리그에서 우승호보로 꼽히던 아르헨티나를 3-0으로 완파하고, 16강에 올라, 덴마크를 꺾고 승부차기에서 꺾고 8강에 진출했다.

1998년 월드컵에서도 4강에 진출한 이후 20년만이다. 크로아티아는 오는 12일 잉글랜드 4강전을 벌일 예정이다.

이번 러시아 월드컵은 스페인 레알 마드리드 소속 루카 모드리치(Luka Modric, 32)의 인기를 끌어올리도 했지만, 크로아티아라는 발칸반도의 소국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한 대회이기도 했다.

 

▲ 크로아티아 위치

 

크로아티아의 민족은 러시아를 포함해 동유럽의 주류민족인 슬라브계라는 게 정설이다. 고대에 러시아 남부에 생활하던 이란계라는 주장도 있지만, 민족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남슬라브계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슬라브족의 대부분이 그리스 정교 또는 그 분파를 믿었지만, 크로아티아인들은 일찍이 카톨릭을 받아들였다.

발칸반도에 슬라브족이 이동한 것은 6~7세기쯤으로 파악된다. 크로아티아인들도 비슷한 시기에 과거 로마제국 속주였던 북부 지역의 판노니아(Pannonia) 공국과 남부 지역의 달마티아(Dalmatia) 공국을 이주해 생활 터전을 확보했다.

당시 판노니아는 프랑크 왕국의 영토였다. 크로아티아인들은 프랑크왕국의 샤를마뉴 대제에 의해 카톨릭으로 귀의하게 됐다. 판노니아의 닌(Nin)에는 최초의 크로아티아 카톨릭 교구가 세워져 동로마제국의 정교회와 대립하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1천년후 대학살의 시초는 여기서 뿌리내린다.

925년에 크로아티아인들은 독자적인 왕국을 세웠다. 초대 왕은 토미슬라브(Tomislav) 공이며, 크로아티아 왕국은 12세기까지 번영했다.

이후 왕위가 끊어지고 헝가리에 왕관을 헌납하면서 헝가리 왕국의 일원으로 잔류했고, 오스만 투르크가 발칸반도를 침공하자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와 도움을 받았다.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 고대 크로아티아 왕국 영토 /위키피디아

 

1차 대전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독립해 1918년 7월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의 일원으로 들어갔다. 이 나라는 남슬라브 종족들의 연합왕국이었는데, 1929년에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유고‘(Yugo)라는 단어는 남(南)이란 뜻이다.)

인종적으로 같은 남슬라브계이지만, 크로아티아는 카톨릭이었기 때문에 다른 슬라브계와 종교적 마찰이 심각했다. 크로아티아인들은 유고 왕국의 전쟁 동원령을 거부하고 국왕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기간인 1941~45년 유고 왕국은 해체되었고, 독일 나치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당시 크로아티아는 나치의 도움으로 유고 연방에서 독립했다. 안테 파벨리치(Ante Pavelić)라는 인물은 나치의 지원 하에 크로아티아의 극우 민족주의 '우스타샤‘(Ustaša) 운동을 이끌며 수많은 세르비아인들과 유태인들을 가톨릭으로 개종하라고 요구하면서 박해했다.

1942년 이후 크로아티아인들이 주도한 우스타샤는 독일의 후원 하에 반세르비아 운동을 벌여 무자비하게 인종청소를 벌였다. 그 잔혹성은 독일군도 놀랄 지경이었다. 그 때 죽은 세르비아인의 수는 50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위키피디아) 이 앙금은 나중에 돌아온다.

 

2차 대전후 유고연방을 형성한 지도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는 대단한 인물이다. 그는 크로아티아도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포함시켜 인종적 갈등을 연방 체제 내에서 녹였다. 이 연방에는 서로 대립하던 크로아티아를 포함해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 마케도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등 6개 공화국으로 구성되었다. 이때 크로아티아는 연방내에 독립국 수준의 자치권을 보장받고, 세르비아인들의 보복으로부터 보호받았다.

1980년 5월 티토가 사망하자 연방 내의 공화국들 사이에 갈등이 불거지면서 공화국들의 독립 조짐에 확산되었고, 1990년대 들어 동유럽에 자유화 물결이 밀어닥치면서 1990년 4월 크로아티아에서 자유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에서 유고 연방에서 독립을 주장하는 민족주의자들이 승리했다.

 

1991년 5월 독립을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되었고 유권자의 93%가 독립을 지지했고, 1991년 6월 25일 크로아티아는 마침내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세르비아인이 주축이 된 유고슬라비아 연방군이 크로아티아 독립을 반대하며 군을 투입했다. 그 배경에는 크로아티아가 독립할 경우 그 지역에 소수민족으로 살고 있는 세르비아계 주민이 다시 학대를 받을 것이라는 우려도 깊이 내재되어 있었다.

내전은 치열했다. 이번엔 세르비아군이 수천명의 크로아티아인들을 학살했다. 2차 대전 기간중 크로아티아인들이 세르비아인들에게 가한 학살의 보복이었다.17만명의 크로아티아인들이 피란을 떠났다.

 

▲ 루카 모드리치 /레알 마드리드 홈페이지

 

크로아티아의 축구영웅 모드리치는 어린 시절에 내전을 겪었다. 그때 모드리치의 나이는 6살. 그의 할아버지는 크로아티아를 점령한 세르비아군에 의해 처형당했고, 그의 아버지는 크로아티아 독립군에 가담했다.

그는 어린 시절에 고향을 등지고 7년간 난민 생활을 했다. 그는 난민 생활 속에서도 친구들과 축구를 좋아했다. 축구를 통해 그는 내전의 아픔을 잊었고, 그의 가족들도 그가 내전 속에 동심을 다치지 않도록 도와주었다고 한다. 삶은 고되고 가난했지만, 그의 가족과 삼촌들이 모드리치가 축구에 전념하도록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모드리치는 축구에 몰두한 덕에 모드리치는 "전쟁의 기억이 거의 없다"고 말한다. 내전의 시기에 난민 어린이들은 축구에 빠졌고, 크로아티아에서 축구는 인기있는 종목이 되었다.

 

1995년 유엔의 중재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EU의 개입으로 데이턴 평화협정이 체결되면서 보스니아 내전과 함께 크로아티아 내전도 종결되었다. 이 협정으로 크로아티아는 독립을 얻고 평화를 얻게 되었다.

 

▲ 크로아티아 축구협회 상징(왼쪽)과 유니폼(오른쪽)

 

하지만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크로아티아 축구대표가 월드컵 4강에 올랐을 때 일각에서는 크로아티아 선수들의 체크무늬 유니폼이 나치를 연상시킨다는 항의의 목소리도 있었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선 크로아티아 축구 대표팀의 수비수 요시프 시무니치가 유럽 예선 때 나치를 연상시키는 구호를 선보였다가 FIFA로부터 A매치 10경기 출전정지 제재를 받기도 했다. 시무니치는 2013년 11월 홈그라운드인 자그레브에서 열린 아이슬란드와의 월드컵 유럽예선 플레이오프에서 본선행이 확정되자 기뻐서 관중들과 함께 "조국을 위해"라고 선창하면 관중이 "준비됐다"라고 응답하는 세리머니를 했다. 이 구호가 2차 세계대전 때 크로아티아의 나치 괴뢰 정권이 대중을 선동하려고 애용한 것이라고 FIFA측은 판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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