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험, 서울 이야기](80) 밝게 빛나는 동네, 명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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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탐험, 서울 이야기](80) 밝게 빛나는 동네, 명동
  • 강대호 칼럼니스트
  • 승인 2024.07.07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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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강대호 칼럼니스트] 얼마 전 페이스북 ‘History of Korea’ 그룹에서 화제가 된 사진이 있었습니다. 1955년에 명동의 한 극장 앞을 지나는 어느 남녀가 찍힌 사진이었습니다. 

이 사진은 두 가지로 화제가 되었습니다. 우선은 극장 간판에 ‘함렡’이라 쓰인 제목이 대체 어떤 영화일까 하는 회원들 간의 공방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앞을 지나는 두 사람의 스타일이 너무나 세련되지 않았냐는 감탄이 이어졌었고요. 

영화는 로렌스 올리비에 주연의 ‘햄릿(Hamlet)’이었고, 극장은 ‘명동극장’이었습니다. 1917년에 ‘낭화관(浪花館)’으로 문을 연 명동극장은 해방 후 재개봉관으로 운영되다 1974년 6월 폐관했습니다. 이후에 중앙투자금융 사옥으로 쓰였고 2016년에 ‘이니스프리’ 매장이 들어섰습니다. 롯데백화점 건너편 명동길로 들어서면 초입에 나오는 2층짜리 건물입니다.

명동극장이 있던 장소로 추정되는 곳. 롯데백화점 건너편 명동길 초입에 있다.

영화 제목 표기법보다 더 낯설게 느껴지는 건 명동극장 앞을 지나는 트렌치코트의 두 남녀입니다. 포마드를 발라 넘겨 단정한 머리를 한 남자와 초록 스커트에 검정 클러치를 든 하얀 피부의 여자입니다. 

이 사진을 처음 봤을 때 혹시 모델이나 배우를 섭외해서 촬영한 설정 샷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멋진 포스를 자아내는 남녀입니다. 요즘 관점으로 봐도 빈티지 스타일의 멋쟁이인 이들의 모습이 촬영된 시기가 1955년이라 더욱 인상 깊게 느껴졌습니다.

서울은 한국전쟁 기간에는 물론 정전 후에도 한동안 민간인 유입을 제한했습니다. 엄격한 심사를 거쳐 ‘도강증’을 받은 일부만 한강을 건너 서울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군인, 경찰, 공무원, 그리고 전후 복구에 도움이 되는 일부 계층에게만 허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1955년경부터 서울의 도시 기능이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고 하네요.

그런 1955년 명동에서 포착된 세련된 스타일의 두 남녀는 전쟁이 멈춘 지 2년 후의 서울 명동 분위기를 상징하는 듯합니다. 전쟁의 참상을 겪은 선배 세대들의 목표는 생존이었겠지만 멋과 낭만 또한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읽힌다고나 할까요.

명동의 유래

명동(明洞)은 조선시대 이 지역의 이름인 명례방(明禮坊)에서 따왔습니다. 남촌에 속한 명동 일대는 북촌과는 다른 분위기의 주거 공간이 들어섰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외국인들이 자리 잡을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1882년 임오군란이 벌어지자 고종은 청에 파병을 요청합니다. 이때 청나라의 군인들과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상인들도 들어옵니다. 이들이 자리 잡은 지역이 지금의 중국대사관 주변입니다.

임오군란으로 서대문 밖의 공사관이 불타버리자 일본은 남산 기슭에 새 공사관을 짓게 됩니다. 이를 지원하는 일본 상인들도 남산자락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이때만 해도 서울에서 청나라가 일본보다 우세한 지위를 누렸습니다. 그러다 형세가 역전된 게 1894년의 청일전쟁이었습니다. 군인과 상인 등 청나라인이 대거 귀국하는 한편 일본인이 급증하게 됩니다. 이들은 청나라 상인들이 세를 불렸던 명동 일대 상권을 접수했습니다. 

그리고 1904년 러일전쟁 후 일본인들은 서울에서 세를 더욱 불렸습니다. 충무로 일대는 일본인 거류민을 대상으로 하는 중심 상가 지역이 되었고, 명동 일대는 일본의 각종 은행과 회사들의 근거지가 되었습니다.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 일제강점기 때 극장인 ‘명치좌’ 건물이었고 한국전쟁 후 국립극장 건물이었다.

명동의 상징물

명동길을 걷다 보면 멋진 근대 건축물을 볼 수 있습니다. 명동예술극장입니다. 한국전쟁 후인 1957년부터 1973년까지 국립극장으로 쓰인 건물입니다. 국립극장이 남산으로 이전한 후 금융기관이 사용하다가 2009년부터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 건물은 원래 명치좌(明治座), 즉 ‘메이지좌’라는 1936년에 준공된 극장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도 명동 일대에서 문화 활동이 활발했었지만, 국립극장이 있었던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명동은 문화의 중심지였고 문화인들이 즐겨 찾았던 공간이었습니다.

당시 문화인들의 사랑방이 되어준 장소가 다방과 주점이었습니다. 물론 시민들도 즐겨 찾는 장소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쟁 후 다방이나 주점은 사람들에게 사무실이자 직업소개소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때로는 전쟁 중 소식이 끊긴 가족이나 지인을 찾는 장소이기도 했고요.

명동길의 한 화장품매장 앞에 그 흔적이 있습니다. ‘문화예술인들이 찾았던 은성주점 터’ 표지석이 그것입니다. ‘명동백작’이라 불린 이봉구와 박인환, 변영로, 전혜린 등의 문화인들이 즐겨 찾던 장소라는 설명이 새겨져 있습니다.

명동은 한때 한국 금융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전쟁 후 모여든 암달러상과 사채업자들이 지하자금 세계를 구축하기도 했고, 5·16 후 지하자금 세력 중 일부는 단자회사를 설립하거나 주식시장에 관여하기도 했습니다. 명동을 걷다 보면 ‘종합금융’이나 ‘상호금융’이라고 쓰인 간판을 흔히 볼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과거 대한증권거래소가 있던 자리에 들어선 ‘명동 아르누보 센텀’ 빌딩.

이런 명동에는 증권거래소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주식 거래는 1920년에 설립된 ‘경성주식현물취인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거래소는 광복 후 해산했고, 1956년에 우리 자본으로 세운 대한증권거래소가 문을 열었습니다. 즉, 1979년에 여의도로 이전하기 전까지 한국의 증권거래소는 약 60년간 명동에 있었습니다. 

대한증권거래소가 있던 옛 건물을 헐어버리고 새로 들어선 게 ‘명동 아르누보 센텀’ 빌딩입니다. 건물 모서리 식당 입구에 옛 역사가 새겨진 ‘대한증권거래소 터’ 안내판이 있습니다. 관심 가지고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아볼 수 없는 위치입니다.

금융 중심지였던 흔적이라면 흔적이랄까 오늘날 명동 일대에는 환전소가 많습니다. 예전에 달러 아줌마들을 볼 수 있던 중국대사관 앞길 등지에서 환전소를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과거 중국대사관 앞길에는 외국 잡지를 파는 서점들도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외국인을 위한 기념품점이나 환전소로 바뀌었습니다.

중국대사관 앞길. 환전소가 많이 보인다.

그러고 보면 명동 일대의 경관에 외국인들이 영향을 끼친 건 140년이 넘은 거 같습니다. 오늘날에도 명동의 중심인 명동길과 연결되는 여러 길에서 참으로 다양한 외국어를 들을 수 있습니다. 각종 업종의 매장과 다양한 먹거리가 모여 있는 명동은 외국인들에게 흥미로운 관광 코스인 건 분명해 보입니다. 

이러한 명동의 인상이 한국에 대한 여러 인상 중 하나로 남을 텐데 어떠한 모습으로 각인될지 궁금합니다. 다만 명동의 각종 매장과 명동에서 만난 한국인들이 한국을 대표하지는 않는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지난 14주에 걸쳐 중구의 여러 지역을 탐험했습니다. 탐사할수록 새로운 걸 알게 되는 매력적인 동네였습니다. 미처 다루지 못한 곳이 많지만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 볼까 합니다. 물론 중구의 다른 지역에 관해서도 계속 취재하고 공부하겠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한강 남쪽의 영등포 일대를 탐험하도록 하겠습니다.

명동의 중심인 ‘명동길’ 전경. 명동성당에서 롯데백화점 방향으로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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