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능산리 고분군에서 왕릉급 무덤 4기 발굴
상태바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서 왕릉급 무덤 4기 발굴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7.04 11: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제강점기 이후 100년만에 재발굴…건물지 확인, 금제장식 출토

 

백제 사비(부여) 시대(538~660년)의 군왕은 성왕, 위덕왕, 혜왕, 법왕, 무왕, 의자왕등 6명이다. 이중 무왕은 전북 익산에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고, 마지막 의자왕은 당나라에 끌려가 낙양성에 묻혔다. 따라서 부여 능산리 백제왕실 고분군에는 네 임금과 왕비가 묻혔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은 부여군과 함께 부여 능산리 고분군(사적 제14호)의 서고분군에 대한 발굴조사를 마쳤다. 이번 발굴조사는 2016년 6월부터 2018년 6월까지 능산리 서고분군 4기에 대해 실시되었으며, 1917년 일제강점기 이후 100여 년 만이다.

 

▲ 부여 능산리 고분군 전경 /문화재청

 

부여 능산리 고분군은 능산리산(陵山里山)의 남사면에 자리하고 있으며,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3개의 군집을 이루고 있다. 위치에 따라 각각 중앙고분군(왕릉군), 동고분군, 서고분군으로 불리며 지난 일제강점기에 세 차례에 걸쳐 조사가 진행되어 15기의 무덤을 확인했다. 이후 중앙고분군의 정비복원 과정(1965~1966년)에서 2기의 무덤이 추가로 확인했으며, 현재까지 모두 17기가 남아 있다.

 

▲ 부여 능산리고분 유구배치도(일제시대 제작) /문화재청

 

이번 발굴조사에서 백제 사비기 왕릉급 무덤의 입지와 조성과정, 초석건물지와 주거지 등에 대한 자료를 확보했다. 특히, 고분군 내 건물의 존재는 삼국 시대 고분군에서 아직 확인된 바 없는, 새로운 것으로 파악된다.

서고분군은 능선을 따라 위아래로 2기씩 배치되어 있는데, 중앙 능선에 2‧3호분이, 동편 능선에 1‧4호분이 있다.

 

▲ 2호분 현실(왼쪽)과 3호분 현실 내부모습 /문화재청

 

4기 모두 지하 깊숙이 조성된 굴식돌방무덤으로 확인되었다. 무덤의 평면은 현실(玄室, 시신이 안치된 방) 중앙에 연도(烟道), 묘도(墓道)가 ‘갑(甲)’자 모양으로 조성되었으며, 잘 다듬은 판석(板石)으로 만들어 졌다. (연도는 고분의 입구에서 유골을 안치한 방까지 이르는 길이며, 묘도는 무덤의 입구에서부터 시체를 두는 방까지 이르는 길이다.)

무덤의 크기는 2‧3호분은 지름 20m 내외, 1‧4호분은 지름 15m 내외다. 2‧3호분과 1‧4호분은 석실의 규모, 석재의 가공 정도, 입지 등에서 차이를 보여 위계 차를 반영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유물은 도굴과 일제강점기 조사로 인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2호분의 돌방 바깥의 도굴구덩이에서 도금된 금송제(金松製) 목관 조각과 금동제 관못, 금제장식 등이 나왔다.

3호분과 4호분에서는 목관에 사용된 금동제를 포함한 관고리와 관못이 확인되었다.

특히, 2호분에서 출토된 금제 장식은 길이 2.3㎝정도 되고, 전체적인 형태는 끝이 뾰족한 오각형을 띠고 있어 부장품의 끝 부분으로 추정된다. 유물에는 용이 몸을 틀고 있는 형상의 문양이 장식되어 있어 특이하다.

 

▲ 2호분에서 출토된 용 문양 금제장식 /문화재청
▲ 4호분 출토 금동제 관고리 /문화재청

 

한편, 서고분군 일대에서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확인된 건물지는 무덤이 조영되지 않은 서편 능선에서 4×2칸(추정)의 초석건물지 1기, 동편 능선의 1호분과 4호분 사이에서 수혈주거지 2기다. 이 건물들은 위치나 구조로 보아 무덤 조성과 관련된 임시 거처나 제사 관련 시설일 것으로 추정된다.

 

능산리 고분군은 일제강점기에 조사되었다.

1915년에 세키노 타다시(關野貞)와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의 조사단이 중앙고분군 3기를 1차로 조사했고, 이어 1917년 야쓰이 세이이쓰(谷井濟一) 조사단이 중앙고분군 3기와 서고분군 4기를 2차 조사했다. 3차 조사는 1938년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 조사단에 의해 동고분군 5기가 조사되었다.

서고분군은 1917년 조사 후 ‘능산리 왕릉군의 서쪽 소계곡 너머에 있는 능선에서 무덤 4기를 확인하고 그 중 2기를 발굴하였다’는 간단한 기록과 4기의 고분 위치를 표시한 간략한 지형도만 남아 있었다. 이번 조사를 통해 100여 년 만에 백제 사비기 왕릉급 무덤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