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험, 서울 이야기](77) 원조 '도떼기·도깨비시장', 남대문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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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탐험, 서울 이야기](77) 원조 '도떼기·도깨비시장', 남대문시장
  • 강대호 칼럼니스트
  • 승인 2024.06.16 09: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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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강대호 칼럼니스트] 남대문시장은 서울시 중구 남창동에 있습니다. 남창동(南倉洞)은 선혜청 창고의 남쪽 동네라는 의미입니다. 19세기 말 선혜청 창고에 시장이 열렸는데 여러 연구자가 이 시점을 남대문시장의 ‘직접적 시초’로 꼽습니다. 

그런데 남대문시장 측은 1414년을 시초라고 홍보합니다. 지금의 남대문로 일대에 ‘시전행랑’이 들어선 때를 남대문시장의 시초로 보는 거죠. 1413년 운종가 일대에 들어서기 시작한 시전행랑은 1414년에 숭례문 일대까지 확대되었습니다.

숭례문에서 종각에 이르는 남대문로는 운종가와 함께 조선시대 한양의 중심 도로였습니다. 그래서 시전행랑뿐 아니라 일명 가가(假家), 즉 임시로 지은 점포가 남대문로 일대에 복잡하게 들어섰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도심에 무분별하게 들어선 가가들은 도시화의 방해물이었습니다. 그래서 1896년 한양의 도로를 넓히는 과정에서 남대문로 일대의 가가들을 철거했습니다. 철거된 상점들은 선혜청 창고로 들어가게 했고요.

선혜청 터 표지판. 숭례문 건너 남대문시장 입구에 놓여 있다. 1897년 선혜청의 창고에서 열린 창내장이 남대문시장의 직접적 시초로 꼽힌다. 사진=강대호

선혜청은 1608년(광해군 원년) 대동법 시행에 따라 대동미·대동포·대동전에 대한 출납을 맡았던 관청이었는데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되어 비어 있었습니다. 숭례문 건너 남대문시장 입구의 숭례문수입상가 앞에 ‘선혜청 터’ 표지판이 있습니다.

가가들이 철거된 이듬해인 1897년 1월에 선혜청 창내장(倉內場)이 열렸습니다. 즉 창고에 열린 시장이었습니다. 많은 연구자가 창내장 개설을 남대문시장의 ‘직접적 시초’로 꼽는 이유입니다. 참고로, 사전이나 옥편을 보면 ‘창(倉)’을 남대문시장을 일컫는다고도 설명합니다. 

조선 후기에는 숭례문 밖의 칠패장도 활발했었는데 20세기 들어 칠패 상인들도 남대문시장에 모여들었습니다. 칠패장 영역에 철도가 들어서 옮길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시장이 커지고 사람들이 모여들자 각종 노점도 생겨났습니다. 그렇게 남대문시장은 성장해갔습니다.

도떼기시장과 도깨비시장의 유래 

과거에 남대문시장이 도떼기시장으로 불렸다는 설이 있습니다. 도떼기는 원래 돗자리에 올려진 물건을 돗자리째 넘기는 상거래를 의미했습니다. 이 방식이 조선 후기 객주들에 의해 남대문시장에서 성행했는데 ‘도떼기’로 거래한다고 해서 이런 설이 나왔던 거죠. 

하지만 상인들과 백성들이 성장시킨 남대문시장은 왕가와 친일파의 이권 사업이 되었고, 1911년에는 친일파 송병준이 대표인 조선농업회사로 남대문시장 관리권이 넘어갔습니다. 1914년 조선총독부는 ‘시장규칙’을 제정해 조선 상인들이 장악한 시장을 통제했습니다. 그래도 남대문시장만큼은 송병준의 관리 아래에 두었습니다.

1930년대 말에 총독부는 남대문시장과 가까운 중림동에 중앙도매시장을 열면서까지 남대문시장을 탄압했습니다. 그래도 살아남았습니다. 친일파 등이 자기네 이권을 지킨 면도 있지만 조선인 상인들의 노력도 컸습니다. 

남대문시장의 군복골목과 지하의 수입품 매장. D동과 E동 사이에 있다. 수입품 매장은 도깨비시장으로도 불린다. 사진=강대호

광복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남대문시장은 혼란의 시기를 겪었습니다. 특히 한국전쟁 후 남대문시장은 사치품과 밀수품, 그리고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물품들 거래가 활발했습니다. 그래서 경찰과 세관의 집중 단속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단속반이 나타나면 상인들은 재빨리 물건을 치우거나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이런 모습이 도깨비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모습으로 비유해 ‘도깨비시장’이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초콜릿이나 껌 등 미국 물건이 많아 ‘양키시장’이라는 별명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이때의 전통을 남대문시장 D동과 E동 지하의 수입 상품 상가가 잇고 있습니다.

그리고 퇴계로 쪽에는 구제품을 파는 곳이 많았습니다. 군대에서 흘러나온 군복이나 군화 등 군수품을 취급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에는 D동과 E동 사이의 ‘군복 골목’이 이때의 구제품 상점의 전통을 잇고 있습니다.

본시장 입구에 걸린 간판. 숫자 1414는 남대문로 일대에 시전행랑이 들어선 1414년을 의미한다. 남대문시장 측은 이때를 시장의 시초로 홍보한다. 사진=강대호

많은 지주가 공유한 시장 건물들

남대문시장은 하나의 시장이라기보다는 여러 구역의 상가가 모인 집합체로 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본시장, C동과 D동, 그리고 E동이 남대문시장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시장은 숭례문 쪽 시장 입구로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갈치골목’ 등 먹자골목과 생선가게 등 전통시장이 있는 구역입니다. 본동시장 혹은 본동상가로도 불리는 본시장은 선혜청 터와 가까운 곳에 있는 것으로 봐서 창내장의 전통을 잇는 시장으로 보입니다. 

남대문시장 갈치골목. 본시장에 있다. 사진=강대호

본시장이 지금의 골목시장 형태로 자리 잡은 건 한국전쟁 후라고 합니다. 사용승인 연도를 확인할 수 있는 건물이 1957년에 건축한 건데 당시로서는 최신 건물이었겠지만 지금은 매우 낙후해 보입니다. 남대문시장 관련 문헌에 A동과 B동, 혹은 A 구역과 B 구역으로 구분되기도 했습니다.

중앙상가로 부르는 C동과 대도종합상가로 부르는 D동, 그리고 E월드로 부르는 E동은 아케이드와 구조물 등으로 연결돼 얼핏 하나의 건물처럼 보입니다. 이들 건물은 바로 옆의 본시장과 달리 집합 상가 형태입니다. 그런데 지주가 많아 원래는 대형 건물을 짓기 힘든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중구난방으로 들어선 점포들이 복잡하게 있었다고 하네요. 

하지만 1968년 대화재로 이 일대가 잿더미가 되자 재건축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화재로 점포들이 싹 헐려 명도에 대한 부담이 적었으니까요. 그래서 지하 1층부터 지상 3층까지의 대형상가 건물을 건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C동과 D동의 경우 건축 당시 지주가 400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수가 소유하는 공유 형태의 건물이 되었습니다. 토지에 대해서는 각 지주가 소유권을 따로 갖고 있지만 건물에 대해서는 토지 지분만큼의 권리만 갖고 있다고 합니다. 복잡한 지주 관계 덕분에 합의에 따른 공유라는 시스템을 적용한 거죠. 

본시장 건물 2층에 입주한 지주회와 상인회. 사진=강대호

본시장도 마찬가지입니다. 2천 평 정도의 넓이에 지주가 20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런 본시장 건물의 2층에 ‘본동상가 지주회’와 ‘본동상가 상인회’ 간판이 달려 있습니다. 지주회는 말 그대로 상가 소유자 모임이고 상인회는 상인들의 모임입니다. 다른 상가들도 지주회와 상인회가 결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남대문시장은 시간이 흘러도 지금의 모습에서 크게 달라질 거 같지는 않습니다. 개발의 1차 결정권을 가진 지주가 워낙 많은 데다 이들의 이해관계가 서로 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80% 이상의 지주에게 동의를 얻기는 무척 어렵지 않을까요.

요즘 남대문시장은 한국식 먹거리로 외국인들에게 인기 있는 듯합니다. 6월 어느 날 점심 무렵 남대문시장 갈치골목과 먹자골목의 분식집에는 외국인들이 꽤 보였습니다. 그리고 남대문로 쪽 보도에는 각종 먹거리를 맛보려는 외국인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습니다. 

이렇듯 남대문시장의 풍경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계속 변하고 있습니다. 

남대문시장 전경. 가운데 보이는 낮은 건물군이 본시장, 즉 위에서부터 A 구역과 B 구역이다. 오른쪽 건물군이 C동과 D동, 그리고 E동이다. 사진=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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